광기를 길들이다 6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자신을 쫓고 있는 서윤재의 시선을 항상 느꼈다.
동경이나 호감이 아닌 강렬한 질투의 시선. 그 질투는 사나웠다.
겉으로는 얌전한 서윤재가 얼마나 사나움을 감추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서윤재는 자신과 동류였다.
스스로에게만 관대한 우리 밖의 짐승.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윤재도 그랬다.
서윤재가 그걸 자각하는지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서윤재는 결코 얌전한 인간이 아니다.
순응하는 인간도 아니고 목줄에 매이는 인간도 아니다.
매이는 것보다는 쥐고 흔드는 쪽이다.
서윤재는 몰랐겠지만 자신이 먼저 서윤재를 발견했다.
보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그 따가운 짜증이 즐거웠다.
집착할 대상을 마침내 찾아냈다는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중에 그녀와 가족이 되었다.
가족이 된 것은 자신이 어머니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기가 막힌 우연으로 어머니와 윤재의 아버지가 호감 어린 만남을 이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어머니를 부추겨 재혼하게 했다.
같이 사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연애보다는 결혼이 안정적이라며 괴물처럼 속삭였고 그 결과 서윤재와 한집에서 살게 되었다.
서윤재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뒤에서 노려보곤 했다.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고, 학교에서도 알은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그녀에게 우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편의점까지 뛰어가 사 온 우산을 그녀의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든가.
늦장마의 비가 내리던 그 밤, 일부러 늦게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집 주위를 배회하다 비를 흠뻑 맞아 젖은 몸을 샤워할 구실을 찾았다든가.
어떻게 하면 그녀를 자신에게 묶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며 마침내 성적이라는 좋은 핑계를 찾아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좋은 머리를 감사할 수 있었다든가 하는 것들.
그리고 서 교수를 부추겨서 그녀의 성적에 대해 잔소리를 하게 한 것들.
그 모든 것들을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했어도 사고는 갑자기 일어났고, 더는 그녀와 가족으로 묶이지 못하게 된 채로 일방적인 이별을 당했다.
그녀 편에서는 자유를 얻었겠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부당한 사건이었다.
그녀를 다시 찾아갈 방법을 찾았다.
그녀가 자신을 탐내게 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탐나는 남자. 그 정도면 족했다.
그랬는데 그녀에게 탐나는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인간에게 탐나는 아들이 되고 말았다.
그때의 갑작스러운 이별이 없었더라면, 9년이라는 공백이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집착했을까 하고 자문해 볼 때가 있다.
대답은 여전히 ‘집착할 것이다.’이다.
서윤재가 살아 있는 한, 제가 살아 있는 한 그녀를 잡아먹고픈 이 탐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건 굶주림이고 탐욕이며 소유욕이다.
사람들은 권력, 명예, 돈에 욕심을 품지만 자신이 욕심내는 것은 단 하나다.
서윤재.
권력에 집착하는 자들에게 왜 권력에 집착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돈과 명예에 집착하는 자들에게, 하다못해 성적과 우승에 목매는 자들에게 왜 그렇게 그것을 이루려고 집착하는지 물어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왜 그렇게 서윤재에게 집착하느냐고 묻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서윤재가 거기에 있고, 자신은 서윤재를 가지고 싶고, 자신은 서윤재를 제 안에 통째로 삼키고 싶고, 서윤재가 아니면 자신의 허기가 채워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서윤재가 아니면 안 되는 거다.
9년간 그것을 매일 뼈에 사무치게 느꼈다. 서윤재 외에 대체품은 없다는 것을.
미쳤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신은 서윤재를 필요로 한다.
“서 팀장님, 지금 간식 사러 나가셨습니다.”
한밤중에 갑자기 전략기획실을 방문한 젊은 사장의 등장에 놀란 기획실 팀원들이 편의점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젊은 사장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다른 셔츠를 입고 있었다.
셔츠에 얼룩이라도 져서 갈아입은 것일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편의점?”
“네. 지금 막 나가셨습니다. 전화로 돌아오시라고 할까요?”
“됐습니다. 내가 가 보죠.”
들고 온 보고서의 마지막 한 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수혁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한밤중에 편의점 데이트도 나쁘지 않다.
생각해 보면 윤재와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다.
9년 전에, 그 비 오던 날에 윤재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지각하지 않게 학교까지 데려다준 것이 전부다.
그때 오토바이에서 떨어질까 봐 제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던 윤재를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그녀의 알람을 일부러 꺼 놓은 것도 자신이다.
지각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편의점에 간식을 사러 간 그녀를 조금은 붙잡아 놓자. 때로는 편의점에서 함께 가벼운 커피 한 잔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통과한 수혁이 막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수혁이 본 것은 여자를 뒷좌석에 태우는 남자였다.
여자는 다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혁은 그 다리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다리의 주인이 신고 있는 구두가 아는 구두였기 때문이다.
차는 급하게 출발했고, 그 자리에는 구두 한 짝만이 남겨졌다.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구두를 집어 든 수혁이 품 안에서 폰을 꺼냈다.
자신 때문에 아직 퇴근도 못 하고 있는 불쌍한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건 수혁이 조금 전에 본 차량의 번호를 불러 줬다.
“번호 조회해서 누구 차량인지 알아내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찾아내. 경찰에는 연락하지 말고.”
세상에는 참 겁도 없는 놈들이 있다. 건드릴 것을 건드려야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아버지 정혁진 회장도 자신에게서 서윤재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서윤재를 건드리면 자신이 어떤 식으로 돌아 버릴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겁 없는 놈이 지금 서윤재를 데려갔다.
“사람 돌아 버리는 꼴이 보고 싶은가 보군.”
수혁의 안에는 항상 폭력의 본성이 도사리고 있다. 다만 그것이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할 뿐이다.
비서실장에게서 한기정의 차량이라는 답변이 온 것은 4분 후였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대답과 함께 ‘차량 이동 경로를 추적 중입니다.’라는 마음에 드는 대답도 돌아왔다.
*
지끈거리는 두통 속에서 윤재가 눈을 떴다.
머리가 아팠다.
두통이 아니라 상처의 통증이라는 것을 그녀는 눈을 뜨며 깨달았다.
입고 있던 셔츠와 손이 온통 피범벅이었기 때문이다.
피 때문에 얼굴이 진득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이 한기정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한기정은 손에 피를 묻힌 채로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런 것도 찍니?”
뭘 찍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자신의 스커트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속옷도 입지 않았으니 찍기 얼마나 좋았겠는가.
단추가 풀려 벌어진 셔츠 안쪽으로 브래지어가 내려가 있다.
윤재가 손으로 제 가랑이 사이를 만졌다.
말라 있었다.
“박지 그랬어? 어머, 아직도 서지 않니?”
적어도 제가 정신을 잃고 있을 때 강간까지는 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기정은 배짱이 좋은 편이 아니다.
심약한 편에 가깝다.
둔기로 제 머리를 내리치긴 했지만 피를 보고 분명 겁을 먹었을 것이고, 겁을 먹은 상태에서는 발기하지도 않았을 것이 뻔하다.
전에 사귈 때 제 입으로 발기가 잘 안 된다고 말했던 기정이다.
혼전 순결 어쩌고 한 이유가 그것이라는 건 윤재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편이 편했다.
발기가 안 되는 편이, 그래서 성적으로 귀찮게 하지 않는 쪽이 윤재에게는 더 편했다.
그래서 한기정을 택했던 건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편했으니 말이다.
발기하지는 않으니 강간도 못 하겠고,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협박용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가랑이 사이를 좀 찍고, 가슴을 찍고, 그런 사진을 찍은 다음에 모두가 볼 수 있는 게시판에 올린다, 뭐 그런 정도의 협박일 것이다.
우습지도 않다.
“유, 윤재야, 나는 우리가 다시 잘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카메라를 내려놓은 기정이 그녀의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 왔다.
지금 윤재는 손을 뒤로 묶인 채로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곰팡이와 먼지 냄새가 나는 것으로 봐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곳이 분명했다.
“그러고 싶었으면 파혼하지 말았어야지. 차라리 같이 망하자, 같이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하자, 가족과 절연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렇게 나왔어야지.”
윤재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피는 아직도 조금씩 흐르는 중이었다.
뒷머리가 찢어진 것이 분명했다.
“윤재야, 우리 외국으로 가자. 응?”
“널 어떻게 믿고? 난 너 못 믿어. 특히 뒤통수나 치는 인간은 못 믿어.”
“30분만 얘기하자는데 네가 들어주지 않으니까.”
“넌 항상 그렇지? 넌 항상 남 핑계만 대지? 파혼도 한경 때문이고, 아버지 때문이고, 회사 때문이고.
넌 책임이 없고 항상 남 책임이지? 이렇게 된 것도 내 책임으로 돌리고 말이야.
넌 평생 그렇게 남 탓만 하고 살래? 나중에는 뭐라고 핑계를 댈래? 언제까지 남의 탓으로 미루고 살래?”
“윤재야.”
“정수혁은 적어도 그렇게는 안 해. 자기가 했으면 자기가 했다고 하고, 자기가 욕심나면 욕심난다고 하지. 너처럼 비겁하지는 않아.”
“정수혁? 그게 누구야? 누군데.”
“누구냐고?”
윤재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피를 흘리면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상하게도 이 상황이 조금도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희열이 느껴졌다.
자신도 미친 건가?
정수혁과 함께 있다 보니 자신도 그 광기에 물든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이 광기가 자신의 안에도 도사리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후자일 것이다.
“가까이 오면 누군지 말해 줄게.”
윤재의 말에 기정이 그녀의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댔다.
“더 가까이.”
윤재의 입술 바로 앞에 기정이 귀를 가져가 댔다.
“정수혁은 말이야.”
윤재가 속삭이듯 말하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단번에 기정의 귀를 물어뜯었다.
“으아아악!”
윤재는 귀를 물어뜯기고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 기정의 중심을 걷어찼다.
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기정이 바닥에서 뒹굴었다.
그 비명을 들으며 윤재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여전히 손은 뒤로 묶여 있었지만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어둠 속에서도 문은 보였다.
자신을 묶어 둔 것으로 안심했을까.
한기정의 허술함을 비웃으며 윤재가 뒤로 묶인 손으로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그녀의 얼굴이 누군가의 가슴에 툭, 하고 부딪친 것은 그때였다.
“뭐야, 서윤재. 구하러 왔더니 혼자 탈출하면 곤란하잖아.”
익숙한 목소리에 윤재가 고개를 들었다.
셔츠를 갈아입은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늦게 온 거야, 정수혁.”
“경찰도 나보다는 빨리 오지 못할걸.”
“옷 갈아입었네?”
“네가 내 옷을 찢었으니까.”
윤재가 수혁을 보며 웃었다.
“뭐야. 웃기도 하고. 서윤재, 오늘은 서비스가 좋은데?”
“그냥. 구질구질한 놈을 보고 있자니 저놈보다는 정수혁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날 좀 좋아하게 된 거야?”
“낫다는 것뿐이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네. 전에는 싫어했는데 이젠 남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주는 것이. 서윤재 원래 본인 외에는 아무도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잖아. 안 그래?”
“넌 왜 이렇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윤재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아 주던 수혁이 옷을 벗더니 셔츠로 그녀의 머리를 싸맸다.
결국 오늘 두 번이나 셔츠를 버린 남자다.
“계속 보고 있었다고 했잖아. 좋아하니까.”
“웃겨.”
수혁이 손목에 묶인 줄을 풀어 주자 윤재가 쓰러진 기정을 가리켰다.
“사진부터 처리해 줄래? 사진 찍었을 거야.”
“무슨 사진?”
“내 가랑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거기.”
“아.”
수혁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닌 섬뜩한 웃음이었다.
“나가 있어, 윤재야.”
“그러려고 했어.”
수혁이 무엇을 할지 윤재는 안다. 알면서도 말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서윤재는 동정심이라고는 없는 여자다.
죽어 가는 서 회장을 동정하지 않았고, 이혼한 엄마를 동정하지 않았으며, 아버지도 동정한 적 없었던 윤재였다.
누구도 동정할 생각이 없다.
누군가 자신에게서 동정받고 싶어 한다면 그건 사람을 잘못 고른 것이다.
자신은 동정을 받고 싶지도 않고 동정을 하고 싶지도 않다.
사람은 약하면 잡아먹히고 강하면 잡아먹는다.
그리고 스스로가 한 일에 책임을 질 뿐이다.
그걸 동정할 이유가 없다.
동정받을 이유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정수혁이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정수혁일지도 모른다.
“하아.”
밖으로 나온 윤재가 제법 시원해진 바람에 어깨를 폈다.
머리는 여전히 아팠지만 가슴은 시원했다.
오랜만에 가슴이 시원했다.
이곳은 버려진 별장처럼 보였다.
예전에 대학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온 기억을 떠올렸다.
이렇게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윤재가 뒤를 돌아봤다.
지금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한기정의 죽어 가는 비명과 퍽퍽, 샌드백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는 어떻게 보면 잔인한 상황을 알려오고 있지만 윤재는 오히려 기분 좋았다.
저렇게 확실하게 해 둬야 한기정이 나중에라도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다.
“정수혁이라니.”
지금 느낀 것은, 자신과 정수혁은 닮았다.
그것이 짜증의 원인이었을지 모른다.
거울에 비쳐 보는 것처럼, 자신들은 닮았다.
만약 세상에 닮은 꼴이 딱 두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수혁과 자신일 것이다.
그래서 수혁이 자신을 발견한 것이고, 자신이 수혁에게 짜증이 났던 건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닮아서.
다른 남자에게, 아니 다른 인간에게 적응할 수 있을까.
이미 정수혁과 이렇게 비슷해졌는데 자신은 정수혁이 아닌 다른 인간에게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건 중독에 가깝다.
9년 전 그날 시작된 중독이다.
그때 그 욕실에서 저를 바라보던 맹수의 시선. 그때부터 이것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중독에서 정수혁이 벗어나지 못하듯 자신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건 거의 예언에 가깝다.
자신들은 서로를 놓을 수도 없고, 벗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나쁘지는 않네.”
정수혁이라면. 자신을 위해서 목줄에 묶여 주는 남자라면, 자신의 앞에 복종할 의사를 보이는 남자라면 나쁘지 않다.
그 남자는 모두의 위에 군림하고, 자신은 그 남자의 위에 군림하고.
제법 괜찮다.
그러다 보면 좋아하게 되는 날도 오겠지.
정확히는 사랑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르겠다.
뭘 사랑이라고 부르는 걸까.
설렘? 두근거림? 뜨거움? 아니면 그리움?
만약 별로 놓고 싶지 않은 이 집착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런 감정도 사랑의 범주 안에 든다면, 그렇다면 다음 달 취임식 즈음에 말해 주자.아주 조금은 좋아졌다고.
그리고 내년 이맘때 선심 쓰듯 말해 주자. 조금은 사랑하는 것 같다고.
원래 먹이는 많이 주는 것이 아니다.
한꺼번에 먹이를 너무 많이 주면 배부른 짐승은 게을러지는 법이다.
게으른 짐승은 사납지 않다.
사납지 않은 정수혁은 매력이 없다.
그러니까 먹이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감정적 먹이를 주자.
말을 순순히 잘 들을 때만 조금씩 먹이를 주자. 아주 조금씩.
그렇게 길들이고, 그렇게 길들여지고.
“나쁘지 않지.”
“뭐가?”
뒤에서 걸어오는 남자의 손과 가슴에 붉은 피가 튀어 있었다.
그건 아마 한기정의 피일 것이다.
“살아 있니?”
“글쎄?”
“구급차 불러?”
“강 실장이 올 거야.”
“나 병원 가야 해.”
“가자.”
수혁이 차 문을 열어 줬다.
그러나 그 문을 외면하고 윤재가 뒷좌석의 문을 열고 올라탔다.
“왜 거기에 타?”
“강 실장님 언제 와?”
“15분 정도 후에.”
“그러면 시간 많네.”
뒷좌석에 올라탄 윤재가 다리를 벌렸다.
팬티를 입지 않은 가랑이 사이로 음모가 드러났다.
그곳을 손가락으로 벌리며 윤재가 입술을 혀로 적셨다.
“빨리 박아. 강 실장님 오기 전에.”
“30분 후에 오라고 전화하면 돼.”
그녀의 벌린 가랑이 사이로 몸을 파묻은 수혁의 등이 꿈틀거렸다.
그 꿈틀거리는 등의 양쪽에서 윤재의 무릎이 움찔거렸다.
“아, 읏.”
좌석의 가죽에 피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윤재가 숨을 헐떡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 미친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수혁을 보는 순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가랑이 사이가 젖기 시작했었다.
수혁만 보면 가랑이가 젖는다.
자신만 보면 젖는다는 수혁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했다.
보기만 하면 젖는다.
보기만 하면 발정한다.
자신들은 이렇게 서로에게 발정하고 있다.
결국 자신들은 상대의 광기에 먹혀들어 가는 중이다.
먹고 먹히고, 광기를 길들이고, 길들여지고, 발정하고, 달아오르고, 섞이고, 한 덩어리가 되어 꿈틀거린다.
이게 정수혁이고, 이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윤재는 깨달았다.
남들은 미쳤다고 부르는 이것이 자신들에게는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하윽!”
제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성난 페니스에 박히며 윤재가 피 묻은 손으로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닿아 오는 뜨거운 체온이 그녀를 녹여 가고 있었다.
강 실장에게 아직 전화를 못 했다.
하지만 눈치 있는 강 실장은 멀리서 이 광경을 보면 알아서 모르는 척 돌아설 것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정수혁의 비서실장을 하지 않겠는가.
툭.
차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9월에 내리는 첫 번째 비였다.
투둑, 투둑.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뒤엉킨 몸은 풀릴 줄을 몰랐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육체를 얽으며 남자가 속삭였다.
“그래서 결혼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에 남자는 그만 웃고 말았다.
“어림도 없어.”
그녀는 여전히 서윤재였기 때문이다.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서윤재. 아직 무너뜨리려면 갈 길이 먼 서윤재, 이 남자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런 최고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길들일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9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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