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어 드는 밤 - 3화 세 번째 이야기
세 번째 이야기
서권주의 둘째 아들 서정주가 죽었다.
대들보에 목을 매고 죽어 있는 것을 하녀가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러 집안사람들을 불렀다고 했다.
물론 소예는 죽은 서정주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지… 주인어른도 그렇게 갑자기 가시고, 이제는 둘째 도련님마저.”
서권주는 급사를 했는데 아직까지도 그가 왜 갑자기 죽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다.
소예와 혼인한 서권주는 나이는 많았지만 건강하기로 소문이 난 사내였다.
그런데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번개라도 맞은 것인지 앉은자리에서 고꾸라져 죽었다.
신방에 들어와서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았으니 술에 독이 든 것도 아니었다.
서권주는 급사를 했고 그의 아들인 서정주는 그 아비가 죽은 지 십육 일 만에 대들보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
밧줄을 단단히 묶고 그 밧줄에 목을 건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한 하녀는 지금도 넋이 반쯤 나가 있다고 했다.
혀를 쭉 빼고 죽은 시체를 발견했으니 오죽할까.
‘자결한 것이 아니야.’
집안사람들은 전부 서정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지만 소예는 그 사내가 자결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결하려던 사내가 밤에 자신을 찾아오겠다고 했을까. 자결하려던 사내의 눈이 그렇게 탐욕스럽던가.
아니다.
그 사내는 자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사내를 죽였을까.
‘서정우가?’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서정우였다.
어젯밤 제발 도와달라고 그에게 매달린 것은 자신이다. 그리고 그 사내는 부드럽게 제 머리를 만져줬었다.
그런 다음 오늘 아침, 서정주가 목을 매단 채로 죽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범인은 서정우였다.
‘혹시 서권주도 서정우가 죽인 것은 아닐까?’
한번 의심이 드니 합리적인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서권주는 왜 급사를 했을까.
누군가 죽인 것이라면, 왜 서권주를 죽였을까.
서권주를 죽인 것과 서정주를 죽인 것이 같은 인물이라면, 그들을 죽일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서정무와 서정우뿐이다.
“마님, 첫째 도련님께서 마님을 찾으십니다.”
서정주의 죽음에 바짝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소예를 부른 것은 하인이었다.
서정무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방을 나서며 소예가 말끔하게 눈이 쓸린 마당을 힐끗 쳐다봤다.
밤새 눈보라가 몰아쳤었다.
그런데 언제 눈이 개었는지 지금은 또 바람이 잦아들었다.
더는 눈도 내리지 않았다.
밤새 내렸을 눈은 마당 한편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지만 마당은 이미 깨끗하게 비질이 되어 있었다.
‘만약 누군가 서정주를 죽인 것이라면 목매단 그의 시신 옆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을 텐데.’
진짜 스스로 목을 매었다면 서정주의 발자국만 남아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 죽인 것이라면 눈 위에 다른 사람의 발자국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
“혹시.”
하인을 따라 걷던 소예가 제 앞에서 걷는 하인을 조심스레 불렀다.
“네, 마님.”
하인이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덩치만큼이나 묵직한 목소리였다.
“둘째 도련님이 목을 매셨다는 그곳에 이상한 것은 없었다고 합니까?”
“이상한 것이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이 이상하다는 것을 소예도 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그 장소를 보지 못했으니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주위에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이라든가.”
“마님.”
하인이 걸음을 멈추고 소예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밤새도록 눈보라가 몰아쳐서 다른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다 한들 묻혔을 것이고, 아침이 되어 하녀가 둘째 도련님의 시신을 발견한 직후에는 사람들이 정신없이 몰려들어서 이미 수십 개의 발자국이 찍힌 후였습니다.”
“그런가요… 그렇겠네요.”
충분히 상상이 갔다.
서정주의 목 매단 시신을 발견한 하녀는 혼비백산했을 것이고, 그 비명에 달려온 사람들의 발자국은 목매단 시신 주위에 어지럽게 찍혔을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 서정주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 발자국은 아마 묻혔을 것이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나요?”
“말씀하십시오, 마님.”
“셋째 도련님께 제가 잠시 뵙고 싶다는 말씀을 전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셋째 서정우를 만나야 한다.
어젯밤의 사내는 서정우였다. 그리고 소예의 짐작에 서정주를 죽인 것은 서정우다.
서정무는 어젯밤 빈소를 지켰을 것이다. 그리고 서정주는 자신의 방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정주는 오지 못했고 대들보에 목을 매달았다.
움직임이 자유로운 것은 서정우뿐이었고, 자신의 방에 와서 저를 안은 다음 돌아가며 서정우는 서정주를 죽였을 수도 있다.
아니다.
자신의 방에 오기 전에 서정주를 죽이고 왔을 것이다.
그래서 서정주가 오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나를 위해서 죽인 것일까?’
너무 앞질러간 생각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서정우는 자신을 위해서 서정주를 죽였을 수도 있다.
하필이면 서정주가 자신의 방으로 오겠다고 한 어제, 바로 어제 죽였다.
어제, 혹은 오늘 새벽.
소예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정우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럴 것이다. 자신이 느꼈던 그 호의는 착각이 아니었다. 그 시선, 그 손의 호의, 그 모든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나를 좋아해서, 사람도 죽이고… 나를 지키기 위해서.’
적어도 이 집에 자신의 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에 소예의 가슴이 울컥거렸다.
재산이나 그런 것을 떠나서 자신의 편이 있다는 것에 그저 눈물이 났다.
눈시울이 젖어 들며 소예가 손끝으로 눈물을 닦으려고 할 때였다.
“꺄!”
깨끗하게 쓸었지만 얼은 부분이 남아 있는 곳을 밟으며 소예의 발이 미끄러졌다.
“아!”
발이 미끄러지며 뒤로 넘어지려는 소예를 붙잡은 것은 하인의 손이었다.
굵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목과 허리를 단번에 붙잡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졸지에 하인의 품 안에 안긴 꼴이 된 소예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대로 넘어졌다면 크게 다쳤을 것이 뻔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소예가 손을 덜덜 떨고 있는 동안, 하인이 그녀를 똑바로 일으켜 세워줬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마당 곳곳에 얼음이 남아서 미끄럽습니다.”
“나, 나는 괜찮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하인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천천히 걸으십시오.”
저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는 하인을 쳐다보던 소예는 문득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서 봤지?’
이 하인의 얼굴이 눈에 익다.
물론 이 집안의 하인이니 이 집에 왔을 때부터 계속 스치듯 봤을 테니까 눈에 익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이상하게 눈에 익은 얼굴이다.
꼭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저어, 혹시 예전에.”
이런 질문은 실례일까?
‘예전에 이 집 말고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있나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얼굴이 눈에 익은 것일까.
지금까지는 이 하인의 얼굴을 똑바로 본 적이 없다. 하인은 항상 허리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미끄러질 뻔한 자신을 잡아주는 하인의 얼굴을 소예는 똑똑히 봤다.
그리고 이 얼굴이 어디선가 본, 예전부터 알고 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는 사람이야. 분명해.’
그런데 서권주의 집안 하인을 자신이 어떻게 아는 걸까?
“예전에 같은 마을에 살았었습니다, 마님.”
소예가 마저 다 묻기도 전에 하인이 묵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지요? 얼굴이 눈에 익어서요.”
같은 마을에 살았다니, 그래서 얼굴이 눈에 익은 것이다.
한마을에 살았다면 서로 말은 나눠보지 않았어도 오다가다 모습은 여러 번 봤을 테니 말이다.
“저는 밤나무집에 살았었는데 혹시 어느 쪽에 사셨는지.”
“우물 근처 싸리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는 집에 살았었습니다. 아마 마님은 저를 모르실 겁니다.”
우물 근처, 싸리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는 집.
물을 길러 가며, 그리고 빨래터에 가며 항상 지나쳤던 집이다.
‘그곳에는.’
그 집에는 미친 노인이 절름발이 아들을 데리고 산다고 또래의 처녀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집의 노인네는 정신이 나갔고, 아들은 절름발이라서 장가도 못 가고 있다는 말을 처녀들이 주고받으며 깔깔거리면서 웃던 것도 기억이 난다.
물론 소예가 그렇게 웃었다는 건 아니다.
소예는 그저 물동이를 이고 그 집 앞을 지나며 그런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저어, 이름이.”
“서주입니다, 마님.”
‘서주.’
소예가 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나 처음 듣는 이름이다.
이 사내와 같은 마을에 살았어도, 이 사내의 집 앞을 매일같이 지나다녔어도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것이 분명하다.
매일같이 지나다녔을 것이다.
매일 아침 물을 길러 다녔고, 매일 정오 후에 빨래를 하러 그 집 앞을 지나쳤으니 말이다.
이 사내는 그때마다 자신을 본 것일까.
‘다리가.’
그제야 소예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다. 사내는 걸을 때마다 오른쪽 다리를 조금씩 절고 있었다.
심하게 저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절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리는 어쩌다가.”
“예전에 심하게 다쳤었는데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아픈가요?”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저 조금 불편할 따름입니다.”
왜 치료를 받지 않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치고 형편이 좋은 사람은 없었다.
아프다고 제때 약을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다쳤다고 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정도로 형편이 좋은 사람도 없었다.
봄의 춘궁기가 지날 때 마을에서 십수 명이 죽어 나가는 것은 새삼스런 일도 아닌 그런 가난한 마을이었으니 말이다.
“이곳에서는 언제부터 일을 한 건가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마님.”
“그래도 저보다는 오래되었겠지요.”
소예가 살며시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을, 그리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향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겨우 이런 것에 마음이 놓일 정도로 그동안 불안했던 것이다.
“좋네요. 고향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소예의 말에 사내는 대답 대신 그저 묵묵히 앞장서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도 저보다 세 발자국 더 앞서 가지는 않았다.
그것이 혹시나 제가 또 미끄러질 때 잡아주기 위함임을 소예도 알았다.
* * *
“어제 정주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서정무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원래도 싸늘한 사내가 독사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노려보자 소예가 움찔거렸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자신이 서정주를 죽인 것도 아닌데 그가 노려보자 뱀 앞의 쥐처럼 몸이 움츠러들었다.
서정무는 죽은 서권주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사내다.
“정주와 무슨 얘길 했습니까, 어머님?”
“그냥… 이 집에 남아 있을지 떠날지 의논을 하려고.”
“그것을 왜 정주와 의논하십니까? 저와 의논을 마친 것이 아니었습니까?”
서정무의 입술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예는 지금까지 서정우가 서정주를 죽였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문득, 서정주를 죽인 것이 서정우가 아니라 서정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소에 있었다고 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누가 알겠는가.
서정주와 자신이 꾸미는 일을 알고 서정무가 동생을 죽였을 수도 있다.
지금 이 섬뜩한 눈빛을 마주하며 소예는 서정무에 대한 의심을 품었다.
“어머님.”
서정무의 목소리가 부쩍 낮아졌다.
“이 집에서 살아서 나가시고 싶습니까? 아니면 정주처럼 대들보에 목을 매단 채로 발견되시고 싶습니까?”
차갑고 섬뜩한 것이 소예의 전신을 휘감았다. 소름 끼치는 두려움이었다.
“정주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어머님도 그렇게 되실까 소자는 두렵습니다. 스무 살의 갓 혼인한 여인이 지아비를 잃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대들보에 목을 매었다고 하면 열녀문이 내려오겠지만 죽은 다음의 열녀문이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죽은 다음에는 열녀문도, 재산도 다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이건 경고다.
그의 제안대로 재산을 전부 포기한 채 나중에 일부만 받고 이 집을 떠나지 않으면 서정주처럼 자살을 위장해서 죽여 버릴 수 있다는 그런 소름 끼치는 경고다.
‘이 사내가 서정주를 죽인 거야.’
이제 확실해졌다.
서정우가 죽인 것이 아니다. 어젯밤 자신을 찾아온 것은 서정우겠지만 서정주를 죽인 것은 이 사내다.
그리고 이 사내는 자신도 죽일 수 있고, 서정우를 죽일 수도 있다.
이 사내의 욕심이 결국 모두를 죽일 것이다.
‘어쩌면 모두 이 사내의 계획일지도.’
서권주를 죽이고 동생들을 죽이고 자신을 내쫓은 다음에 재산을 전부 차지하려는 것이 애당초 이 사내의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소예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친정으로 그만 돌아가시지요. 더는 수절을 하시지 않아도 누가 욕하겠습니까. 돌아가실 때 설마 소자가 빈손으로 어머님을 보내겠습니까.”
결국 소예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서정주가 죽은 마당에 누가 서정무를 당해내겠는가.
별채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서정우가 서정무를 감당하겠는가.
그랬다가는 서정우도 서정주처럼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
“어머님, 혹시라도.”
서정무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우리 막내 정우에게 도움을 청하실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이건 어머님을 위한 경고입니다. 정주를 만나신 것처럼 정우를 만날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 품지도 마십시오.”
소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엇을 하더라도 이 사내의 눈길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 *
결국 소예는 결심을 내렸다.
[내일이라도 바로 이 집을 떠나겠습니다.]
[내일은 너무 이르니까, 사흘 뒤로 하지요. 정주의 시체가 오늘 발견되었는데 내일 당장 어머님께서 이 집을 떠나시면 남들 보기에 좋지 않으니 사흘 뒤로 하겠습니다.]
사흘 뒤.
소예는 이 집을 나간다. 그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이 집에 들어온 이상 서권주의 그 막대한 재산 중 일부라도 가지고 돌아가서 더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 얽매여 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가난은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손바닥만 한 땅을 두고서도 이웃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이웃집 아이들이 먹을 것을 빌러 와도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는 일도 많았다.
병든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고, 보리쌀 한 바가지만 빌려 달라고 해도 그것을 빌려주면 자신들이 굶으니 이를 악물고 문을 닫아건 채로 귀를 막아야 하는 것이 가난이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가난을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머리에 이고 살아왔다.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넉넉한 것이라는 게 뭔지 모른 채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 무서웠다.
소작료를 내지 못해 이 집에 끌려왔을 때, 서권주의 눈에 들어 그와 혼인하게 되었을 때 늙은 서권주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무섭고 싫기보다는 더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 치를 떨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속물이라고 해도 좋고 욕심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가난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누구도 모를 무서운 괴물이다.
소예는 그저 그것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면 누구의 아내가 되어도, 무슨 짓을 당해도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서권주의 재산을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재산만 있으면 일생 동안 더는 가난에 눌리지 않아도 된다.
자신도, 자신의 가족들도 더는 가난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모른 척하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사람이 사람처럼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가난이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면, 돈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목숨 앞에서는 그마저도 중요하지 않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이니 말이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셋째 도련님을 만나봐도 괜찮을까.’
대낮에 사람들의 눈에 띄게 서정우를 만나면 서정우 역시 서정무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자신과 작당을 했다고 의심을 사서 말이다.
그러려면 역시 한밤중을 이용해야 하지만 오늘 밤 자신은 빈소를 지켜야 한다.
‘오늘 밤에도 그가 나를 찾아올까.’
지금까지 소예는 빈소를 꽤 여러 번 지켰다. 그 사내는 빈소에까지 찾아와서 저를 범했다.
그것은 무척이나 죄책감이 드는 일이었다.
서권주의 위패와 향단이 놓인 빈소에서 눈이 가려진 채로 모르는 사내에게 범해지는 것은 무척이나 죄스럽게 느껴졌지만 몇 번이 반복되자 그 죄책감도 사라졌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밤에도 그 사내는 빈소로 찾아올 것이다.
오늘 밤, 그리고 내일 밤이 마지막이다. 사흘 후에는 이 집을 나가야 한다.
그러면 그 사내, 서정우와도 마지막인 것이다.
‘만나러 갈 수 없으니 만나러 와주시기를 바라야 하는 것일까.’
서주라는 이름의 동향 사내에게 부탁해서 서정우에게 자신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달라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서정무가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다면 도리어 그것이 서정우를 위험하게 할 것이다.
‘오늘 밤에 그분이 오셨다가 오히려 위험해지시면.’
그를 한 번 더 만나고 싶다.
이제 다른 욕심은 없다.
그를 만나서 그가 자신을 매일 밤 품은 것이 그저 욕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는지 마지막으로 묻고 싶었다.
이제 정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 하나다.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을까.
자신을 조금이라도 인간적으로, 혹은 여인으로 생각해서 호의를 가지고 매일 밤 찾아왔던 것일까.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다. 그 마음의 진실만을 알고 싶을 뿐이다.
덜컥.
소예가 방문을 열었다.
“누가 있나요?”
마당에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소예의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아무도 없나요?”
지금 집안은 정신이 없을 것이다.
서권주가 죽은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오늘 서정주가 죽었으니 또 초상을 치러야 한다.
집안 하인들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빠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집안사람이 죽었으니 문상객을 받기 위해 자리를 마련해야 하고, 또 빈소를 차려야 하고, 장지도 준비해야 한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쁘니 이곳까지 신경을 쓸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 분명했다.
“마님.”
마당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사내 서주였다.
오른쪽 다리를 조금 절룩거리며 사내가 방문 앞으로 와서 허리를 숙였다.
그를 본 소예가 안도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동향 사람. 이 집에 오기 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믿어도 될지도 모른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아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네요.”
“말씀하십시오, 마님.”
“혹시 셋째 도련님께 제 말을 전해드렸나요?”
“아직입니다, 마님. 집안이 워낙 뒤숭숭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셋째 도련님께 오늘 밤에는 오시지 말라고 꼭 전해주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해가 지기 전에 꼭 전해주세요. 오늘 밤에 오시면 큰일이 난다고. 절대 오시지 말라고.”
그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그래서 그 마음을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그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가 서정주처럼 죽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서정우가 만약 병약하지 않은데 병약한 것처럼 꾸미고 있다면, 그건 어쩌면 서정무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병약한 것처럼 꾸며 서정무에게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데, 만약 자신을 만나러 오다가 들켜서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그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않을 생각이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픈 욕심보다는 그가 살아주기를 바라는 욕심이 더 컸다.
“제발 오시지 말라고, 꼭.”
눈물이 왈칵 터질 것 같아서 소예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사내는 저를 범했다.
자신이 자는 방에 들어와서 제 눈을 가리고 제 입에 재갈을 물리고 저를 범했지만 지금에 와선 그가 조금도 밉지 않다.
외딴 섬에 고립된 것처럼 혼자였던 이 집에서 자신이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온기였다, 그 사내는.
집안의 모든 이들이 저를 이방인 보듯이 하고, 서정무가 독사처럼 자신을 보고 있던 가운데 그 사내는 자신이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온기였고 유일하게 느낄 수 있었던 기쁨이었다.
그렇게라도 누군가가 매일같이 저를 찾아와 주는 것이 기뻤다.
이 집에서 자신은 유령이었다.
좋은 방에 좋은 이불에 좋은 음식을 매일같이 받아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 한 명 없었고, 자신과 눈을 마주쳐주는 사람 한 명 없었다.
마님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이 집안사람들이 저를 진짜 마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있어도 없는 사람, 그것이 자신이다.
그런데 그 사내가 찾아와 주었다. 밤새도록 같이 있어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사내와 살을 부대낄 때, 그 사내가 누군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혼자가 아닌 것이 중요했고, 내일도 찾아와 줄 거라는 것이 중요했다.
결국에는 몸이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길들여진 것이다.
설령 그 사내에게는 욕심이고 욕정이었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있어서는 기다림이었고 온기였으며 하룻밤의 단꿈이었다.
젖어 드는 밤은 소예에게는 적어도 그랬었다.
몸이 젖어 들고 마음도 젖어 들었다. 그 사내에게.
“제발 오지 말라고 꼭 전해 주세요.”
“.”
서주가 소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이내 허리를 숙였다.
“네, 마님. 전해 올리겠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돌아서서 다리를 절룩이며 걸어가는 사내 서주를 소예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사내는 이곳에 적응을 했을까. 저 사내도 이곳에서 혼자인 것은 아닐까.
아마 저 사내는 괜찮을 것이다.
체격이 좋아 다리를 절어도 하인으로 들어왔을 테니, 분명히 묵묵히 일을 잘할 것이다.
바깥의 공기가 무척이나 차갑게 얼어붙어서 소예는 멀어지는 사내를 더는 바라보지 못하고 방문을 닫았다.
* * *
빈소는 추웠다.
바닥에는 구들이 깔리지 않아 냉기가 돌았고, 빈소 안에는 화로 하나만이 전부였다. 그 하나의 화로로 밤새 냉기를 견뎌야 하는 것이다.
“하아.”
소예가 얼어붙은 찬 손에 입김을 불었다.
추운 것은 익숙하다. 겨울이 되면 군불을 땔 장작을 구하는 것도 무리일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산에 가면 널린 것이 나무라고 하지만, 그 나무를 일일이 베어서 장작으로 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무를 베는 일은 허가를 받은 자들만 할 수 있었고, 그 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고작 산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내려오는 것이 전부였다.
돈을 주고 장작을 사지 못하면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모아 그것으로 불을 때어 겨울을 났다.
그런 이유로 겨울에 얼어 죽는 사람은 흔했다.
더운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얼어붙은 냇물을 깨고 그 찬물에 빨래를 하느라 겨울 내내 손이 멀쩡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 추위는 차라리 견딜 만했다.
‘그가 셋째 도련님께 제대로 전했겠지.’
서주라는 이름의 그 하인이 서정우에게 제대로 자신의 말을 전했기를 바라며 소예는 소매 안으로 차가워진 손을 감췄다.
화로를 바로 옆까지 끌어당겼지만 빈소의 냉기를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바스락.
얼어붙은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소예가 바짝 긴장했다. 누군가 빈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녀일까?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간이다.
서정무? 아니면 서정우?
만약 서정무라면 자신을 죽이려고 오는 것일 테고, 서정우라면 서주에게서 그 말을 전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만나러 오는 것이리라.
‘제발.’
두 사람 다 아니기를 바랐다.
서정무가 이곳에 나타나서 자신이 그의 손에 죽는 것도 싫었고, 서정우가 이곳에 나타나 서정무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싫었다.
그냥 자신이 잘 있나 확인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하녀이기를 바랐다.
소예가 바짝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마님.”
소예의 귀를 건드린 것은 하인 서주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소예의 긴장이 일순 풀렸다. 서정무도 서정우도 아닌 서주였다.
“별일 없으십니까?”
아무래도 자신이 걱정되어 와본 것이 분명했다.
“별일이 있을 것이 있나요.”
소예가 휘장을 들어 올려 빈소 마당에 서 있는 서주의 모습을 확인했다.
“지나가는 길에 마님 걱정이 되어 잠시 들렀습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소예가 애써 웃어 보였다.
서정무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둘째 도련님 빈소를 지키느라 소인이 근처에 있습니다. 혹시 사람을 부를 일이 있으시면 소인을 부르십시오. 부르시면 바로 오겠습니다.”
서정주가 그렇게 죽었으니 서주도 걱정인 모양이었다.
집안사람 누구도 서정주가 그렇게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서정주처럼 욕심이 많은 사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누가 믿겠는가. 다들 서정무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그저 쉬쉬할 뿐이다.
그런 분위기이니 서주도 걱정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도 내일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고마워요. 마음을 써줘서. 그런데.”
“셋째 도련님께는 전해 올렸습니다.”
“네.”
자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아는 것이 분명했다.
“정말 고마워요. 정말.”
소예는 진심으로 서주에게 감사했다.
왜 저런 사내가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진즉 알지 못했을까. 사는 것이 너무 각박해서 이웃에 사는 이에게 너무 관심이 없었던 것이었을까.
저렇게 착하고 우직한 사내가 이웃에 사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쩌면 저 사내와 자신은 얼굴을 보고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서주가 사라지자 소예는 다시 빈소에 홀로 남았다.
사락, 사락.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신기한 것은,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조용해져야 하는데, 너무 조용한 세상에 눈이 내리면 오히려 눈 내리는 소리가 사락사락 들린다는 것이다.
눈 위에 눈이 쌓이는 소리다.
사락, 사락.
눈 위에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소예는 잠시 눈을 감았다.
서걱.
발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서걱, 서걱.
쌓인 눈 위를 걷는 발소리에 소예는 서주가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자꾸 오지 않아도 되.”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던 소예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층계를 밟아 올라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서정무였기 때문이다.
싸늘한 얼굴을 한 사내가 층계를 올라와 빈소의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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