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태전 - 2장 재간택
二장. 재간택
“전하! 전하아아아!”
간드러진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내시부 상전을 무시하고 운이 성큼성큼 걸었다.
체격이 크고 다리가 긴 탓에 운이 성큼성큼 걸으면 그 뒤를 따르는 내시와 나인들은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따라가야만 했다.
“전하아아! 돌아가셔야 하옵니다!”
뒤따라오며 상전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애원했지만 운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왕대비마마께서 전하를 모셔 오시라고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전하!”
“됐다. 지금 만나서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
왕대비전에서 왜 자신을 찾고 있는지 운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이번 간택 때문이다.
오늘은 초간택이 있는 날이다.
오늘 초간택에 든 서른 명이 넘는 처녀 중에서 여섯 명 정도를 추려 재간택을 하고, 그중에서 다시 세 명을 골라 삼간택을 한 후에 최종 후보 세 명 중에서 마지막 한 명을 왕비로 간택한다.
임금이 왕비의 간택에 참여하는 것은 마지막 삼간택뿐이다.
초간택과 재간택은 전적으로 왕대비와 왕실의 웃전들의 소관이다.
결국 최종 삼간택에 오르는 처녀는 운의 마음에 드는 처녀가 아니라 왕대비와 왕실 웃전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이다.
자신과 평생을 살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왕비를 정하는 데 왜 처음부터 자기 의사가 반영이 되지 않는 것인지 운은 그것이 우스웠다.
왕실의 전통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운은 초간택에 드는 처녀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운이 좋았던 걸까. 운은 조금 전에 초간택에 참여한 처녀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만났을 뿐인가. 음란한 짓도 했다.
운이 만났던 처녀는 노란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있어서 초간택에 든 처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필이면 처녀가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교태전은 비어 있다.
운이 즉위한 이후로 교태전은 계속 비워진 채다.
보통은 즉위하기 전 세자 시절에 세자빈을 얻고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세자빈은 왕비가 되어 교태전의 주인이 되기 마련이지만 운은 세자 시절에 세자빈을 잃었다.
세자빈을 잃은 지 두 달도 되지 못해 선왕이 붕어하며 운은 결국 왕비가 없이 임금의 자리에 즉위했다.
운은 삼 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그리고 상복을 입는 삼 년 동안에는 절대로 왕비를 얻지 않겠다고 의지를 천명했고, 대신들은 그런 운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러나 약속한 삼 년이 지나면서 대신들은 왕비를 얻어야 한다고 앞다투어 요구해왔다.
어떻게 일 년은 버텼지만 더는 버티지 못하고 기어이 이번에 간택이 시작되었다.
세간에는 운을 가리켜 효심이 지극하다느니, 죽은 세자빈과의 정이 돈독해서 순애보를 지키고 있다느니 온갖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실은 운은 그렇게 효자도 아니고, 또 죽은 세자빈과 죽고 못 할 정도로 사랑했던 사이도 아니다.
항상 운의 곁을 쫓아다니는 상전 지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진실이 있다.
그건 운이 죽은 세자빈의 옷고름도 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운은 세자빈이 싫었고, 세자빈 역시 운을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은 세자빈은 왕대비가 정한 여자였다.
왕대비의 외가 쪽 먼 친척의 딸이었던 세자빈은 완벽하게 왕대비의 수족이었지, 운의 아내는 아니었다.
그녀는 왕대비의 말만 들었고 운의 말은 항상 무시했다.
왕대비는,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운의 모후인 그녀는 운의 생모는 아니다.
운을 낳은 생모는 운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왕대비는 그 후에 왕비로 책봉된 계비다. 운에게 있어서는 계모인 셈이다.
왕대비는 선왕과의 사이에서 대군 두 명과 옹주 세 명을 낳았다.
즉, 왕대비에게 있어서 가장 눈에 거슬리는 존재는 항상 운이었다. 세자인 운이 죽으면 임금의 자리는 왕대비 소생의 대군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왕대비는 운이 세자이던 시절 몇 번이나 운을 죽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빈번하게 실패로 돌아가자 세자빈을 제 사람으로 들이고 세자빈을 통해 운을 죽이려고 했었다.
운이 마실 뻔했던 독이 든 식혜를 세자빈이 마셨고 세자빈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하지만 그 죽음을 비밀에 부친 것은 선왕이다.
선왕은 일이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해 세자빈의 죽음을 병사로 알리게 했고, 자신에게까지 여파가 미치는 것을 두려워한 왕대비도 그것을 도왔다.
그렇게 해서 세자빈이 죽고 운은 왕대비를 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왕대비는 아직도 대권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간택이 준비되는 것을 보며 운은 최종 삼간택에서 뽑히는 처녀는 왕대비의 사람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 애초에 초간택에 오르는 모든 처녀가 왕대비의 입김이 닿아 있는 처녀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처녀가 왕비로 간택이 되든 간에 정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같은 이불을 덮고 살지도 못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왕대비의 욕심과 그녀가 저지르고 있는 짓을 알면서도 운이 왕대비를 쳐내지 못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어린 두 동생 때문이다.
비록 다른 배를 타고 태어났지만, 두 대군은 운에게 있어서는 사랑스러운 동생들이다.
왕대비와는 달리 두 동생은 운을 잘 따르고 있다.
그 두 동생 때문에 운은 왕대비를 아주 내치지도 못한다. 그리고 흠도 없이 왕대비를 내쳤다가는 어떤 상소가 빗발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대비가 권세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왕비가 들어오기 전까지다.
내명부의 주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왕비다.
교태전의 주인이 내명부의 주인이고, 왕실의 안주인이다.
그러니까 왕비가 책봉되면 왕대비는 그 권세의 대부분을 잃게 된다.
그걸 아니까 지금 왕대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사람을 왕비로 삼으려 드는 것이다.
이번에도 왕대비의 뜻대로 그녀의 사람이 왕비가 될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던 운이었다.
어떤 여자가 왕비가 되어도 정 주지 않으면 그만이고, 경계하면 그만이고, 거리를 두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중에 오늘 그 처녀를 만났다.
임수영.
속바지에 구멍이 네 개나 뚫려 있었다. 낡고 오래된 속바지에 입고 있는 저고리는 미묘하게 몸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잡아본 그 손은 살결이 거칠었었다. 평소에 허드렛일을 늘 하고 있다는 뜻이다.
가난하다는 핑계가 그저 핑계가 아니라 진짜 가난한 집안의 딸이 분명했다.
‘진사시에 겨우 합격해서 시골에서 훈장을 하는 양반의 딸이라.’
그녀가 말한 그녀의 집안이다.
어떻게 그런 집안의 처녀가 초간택에 이름을 올렸는지 그것이 의문이다.
고운 분을 바르고 향주머니를 몸에 차고 있는 그런 부유한 집 처녀가 아니라 뺨에는 주근깨가 작게 박혀 있던 얼굴. 남의 것을 빌려 입고 온 것 같은 의복.
잘 사는 집의 처녀가 아니면 초간택에 이름이 오르지 못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실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수도 때때로 하늘이 정한 한 수인 경우가 있다.
만약 그 처녀가 정말 왕대비가 고른 처녀가 아닌, 우연히 실수로 초간택에 든 처녀라면 이건 운에게 있어서는 기회다.
왕대비가 정한 처녀가 아니라 자신이 고른 처녀로 왕비를 삼을 수 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왕실의 전통’을 무시하고 대비전에 찾아갔었다.
막 초간택이 끝나고 처녀들을 모두 내보낸 다음 왕대비와 옹주들이 재간택에 이름을 올릴 처녀를 고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들은 벌써 여섯 명의 처녀들의 이름을 골라 놓았고, 그중에 당연히 임수영의 이름은 없었다.
‘주상! 이건 법도에 어긋난 일입니다! 주상께서 초간택에 관여하시는 것은!’
당연히 왕대비는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그 반응을 무시하고 운은 왕대비와 옹주들의 눈앞에 그들이 버린 이름, 초간택에서 탈락한 처녀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 중에서 하나를 찾아내, 먼저 고른 여섯 명의 처녀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 위에 올려놓았다.
임수영의 이름이 적힌 종이였다.
‘이 처녀도 재간택에 올리십시오.’
그렇게 통보하고 운은 왕대비전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금 왕대비전에서 자신을 불러오라고 애꿎은 상전을 들볶아댄 것이 틀림없다.
난리가 났을 것이다.
자기들이 정한 여자들로 후보를 만들고 그중에 한 명을 이미 왕비 감으로 내정해놓았을 텐데 갑자기 자신이 뜬금없이 임수영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으니 말이다.
“지명아.”
운이 뒤쫓아 오던 상전을 돌아봤다.
그러자 상전이 혹시 운이 대비전으로 갈까 싶어 얼른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시킨 대로 그 처녀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느냐?”
“네? 네, 전하. 그리하였습니다.”
“잘했다.”
운이 상전 지명에게 시킨 것은 수라간 나인들에게 일러서 오늘 초간택에 든 처녀 중 임수영이라는 처녀에게 점심거리를 가져다주라는 것이었다.
보통 초간택에 드는 처녀들은 점심거리를 싸 들고 들어온다.
반합과 찬합에 도시락을 준비해서 들어오지만, 그 처녀는 ‘주먹밥’을 가지고 왔다고 제 입으로 말했었다.
‘주먹밥이라니.’
아니, 아무리 궁색해도 초간택을 위해 궐에 들어오는데 주먹밥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수라간에 명하여 음식을 조금 가져다주라 했다.
‘좀 잘 먹어야 가슴도 더 커지겠지.’
임수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처녀는 모든 면에서 마음에 들었다.
초간택에서 떨어지면 궁녀가 되어 가족들을 부양하겠다는 효심도 마음에 들었고, 얼굴도 꽤 고운 것이 딱 운의 취향이었다.
다만 딱 하나, 가슴이 조금 빈약했다.
조금 전 그 처녀의 가슴을 손으로 주물럭거리고 입으로 빨아본 다음 운이 내린 결론은 가슴은 씹을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무르고 씹고 빨 맛이 있어야 하는데 살집이 좀 부족했다.
그래도 괜찮다.
집이 가난해서 못 먹어서 그럴 것이다. 잘 먹고 편하게 지내면 살이 오르면서 가슴도 풍만해질 것이다.
‘재간택을 위해 또 궐에 들면 그때는 뭘 할까.’
초간택에서 떨어질 줄 알았는데 재간택에 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수영이 지을 표정이 궁금해서 운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오랜만에 짓는 즐거운 미소였다.
한편, 아무리 생각해도 수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대체 왜? 대체 어떻게?
초간택에 덜컥 붙어버리다니.
‘내일 사시(오전 9시~11시)에 궐문 앞까지 오셔야 합니다.’
오늘 수영에게는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다들 점심을 먹기 위해서 가지고 온 도시락을 열고 있을 때 수영은 보자기에 싸 온 주먹밥을 꺼냈다.
그런데 한 궁녀가 수영을 찾더니 갑자기 반합과 찬합에 담아온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몇 단으로 만들어진 찬합 안에는 갓 만든 따뜻한 찬들이 보기 좋은 모양새로 담겨 있었다. ‘수라간’에서 만든 것이라고 궁녀는 강조해서 말했었다.
결국 수영은 다른 처녀들의 시선을 받으며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 그 시선들은 따가웠지만, 도시락은 꿀맛이었다.
그런 진수성찬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젓가락으로 집는 반찬은 맛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입안에서 사르륵 녹는 맛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깨달았다.
도시락까지는 누가 그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이름은 운이다.’
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군관.
궐 안에서 지위가 높은 사내라면 궁녀에게 부탁해서 도시락을 가져다줬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초간택을 통과해서 재간택에 든 것일까?
오늘 대비전에서 다른 처녀들이 이것저것 질문을 받을 때 수영은 단 한 마디의 질문도 받지 못했다.
왕대비도, 옹주들도 수영에게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수영이 느낀 것은 노골적인 멸시였다.
그 눈빛들.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찌푸리던 눈살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고급 비단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것을 수영도 안다.
다른 처녀들처럼 부유한 집안의 딸이 아니라서 그런 시선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평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수영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나중에 처녀들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로 돌아와서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그랬었는데 어떻게 초간택을 통과한 것인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처녀, 안에 있어?”
문밖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수영이 벌떡 일어나 앉아 문을 열었다.
“네, 아주머니.”
오늘 아침에 주먹밥을 싸줬던 주막의 주모가 문밖에 서 있었다.
주모는 손에 작은 소반을 들고 있었다.
“저녁은 아직이지?”
“네?”
“저녁밥이나 먹고 자라고.”
주모가 소반을 방 안에 들여놓아 주자 수영은 당황했다.
수영은 겨우 이 주막을 잡았다.
그것도 원래는 하룻밤이었다.
오늘 초간택에서 떨어질 거라 예상했기 때문에 어제 하룻밤만 묵고 오늘 바로 시골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재간택에 붙는 바람에 주모에게 사정해서 겨우 하루를 더 묵게 되었다.
가진 것으로는 방값을 치를 수가 없어서 방값의 절반만 내는 대신에 저녁밥은 먹지 않고 내일 아침밥도 먹지 않겠다고 했었다.
다행히 낮에 기름진 음식을 잘 먹었기 때문에 내일까지는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주모가 저녁 밥상을 들고 온 것일까?
‘돈이 없는데.’
밥값이라도 받으면 곤란했다.
“밥값 걱정은 말고 얼른 먹고 상은 밖에 내놓기만 해. 그리고 내일 아침밥 걱정도 하지 말고.”
살살 웃으며 밥상을 두고 돌아서서 사라지는 주모의 뒷모습을 보며 수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제게 왜 갑자기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일단, 주신 밥이니까 먹고 봐야겠지?’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차린 밥상이니 먹고 보자는 생각으로 수영이 수저를 들었다.
‘참 이상한 날이야.’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날이다.
그중에서도 도무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그 ‘운’이라는 사내였다.
그 사내가 제게 한 짓을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망측스러웠는데.’
궐에서, 그것도 왕비가 사용하는 교태전에서 그 사내에게 젖가슴을 내보였고 또 은밀한 곳을 만지게 허락하고 말았다.
모르는 사내가 젖가슴을 빨고 가랑이 사이의 음부를 만지는 손길에 자신은 마지막에는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을 수 없어서 결국 주저앉아버리자 그제야 사내는 손을 멈췄다.
그때는 이미 가랑이 사이가 흥건하게 젖어버린 후였고, 속바지도 흠씬 젖어버린 후였다. 마치 속바지에 오줌이라도 눈 것처럼 말이다.
사내의 손길이 닿은 것은 맹세코 처음이다. 그런데 기분은 정말 이상했다.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았고, 전신에 불이 붙은 것도 같았다.
배꼽 아래가 간질간질하고 가랑이 안쪽은 덜덜 떨렸다. 자기 몸 안에서 그렇게 많은 물이 나올 줄은 몰랐다.
대체 그건 뭐였을까.
그 사내는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내가 궁녀가 되어 궐에 들어가면 그 사내는 매일 그런 짓을 할까?’
어떻게 운이 좋아서 재간택에 들었지만, 운은 거기까지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하늘이 뒤집혀도 재간택에서 단 세 명만 올라간다는 삼간택까지 자신이 갈 리가 없다.
‘내일도 그 사내를 만나는 걸까?’
지금 수영의 관심은 재간택이 아니라 운이라는 사내에게 온통 쏠려 있었다.
내일도 그 사내를 만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방 안의 불이 꺼지는 것을 확인한 운이 돌아섰다.
“전하.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운의 호위를 맡은 이현이 조심스럽게 재촉했다.
운이 평소에 미행을 즐겨하는 탓에 이현은 그를 모시고 궐 밖으로 나오는 것에는 이력이 나 있는 무사였다.
하지만 오늘 운은 평소보다 조금 멀리까지 나왔다.
이렇게까지 외곽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 이현도 조금 긴장했다.
평소 운이 궐을 나와 미행하는 곳은 주로 선비들이 사는 근방이었다.
그렇게 한밤중에 평소 총애하던 집현전의 학사들을 찾아가 차를 얻어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양 외곽의 주막까지 발걸음을 했다.
먼저 운이 ‘임수영이라는 처녀가 묵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보거라.’ 하고 말을 했었다.
그래서 이현이 이 주막을 알아냈고, 운은 기어이 여기까지 왔다.
“영아.”
운이 그의 우검 역할을 맡고 있는 이영을 돌아봤다.
운에게는 두 명의 운검무사가 있다.
한 명은 좌검 이현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우검 이영이다. 두 사람은 쌍둥이 형제로, 조선에서는 제일가는 검객이다.
이 두 사람이 아니더라도 운 역시 검술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운은 늘 이영과 이현에게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하고 있지만 운이 임금이고 두 사람이 호위무사인 이상 제대로 된 겨루기가 될 리가 만무하다.
두 사람은 절대로 이현에게 칼을 겨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은 항상 시시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영이 너는 여기에 남아서 저 처녀를 지키거라.”
“네?”
뜻밖의 명령에 이영이 눈을 크게 떴다.
“하오나 전하. 소신은 전하의 곁을 떠나면.”
“왕대비가 저 처녀를 노릴 것이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 저 처녀를 지키라는 것이다.”
오늘 왕대비는 임수영이라는 이름을 기억했을 것이다.
운 때문이다.
전에 없이 운이 대비전으로 와서 임수영이라는 이름이 적힌 종이를 뽑아 간택에 참견했으니 아마 왕대비는 분명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임수영을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외진 곳에 있는 주막에 혼자 묵는다는 것은 ‘날 죽여 줍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왕비가 될 여자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알겠느냐?”
“네, 전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왕비가 될 여자.
그 말에 이영이 운이 저 여자를 만나러 온 이유를 아니, 보러 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떤 인연으로 운이 저 여자를 왕비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운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문밖에 두거라.”
운이 궐에서부터 가져온 보따리를 이영에게 내밀었다.
주모에게 돈을 주고 수영의 밥상을 차리게 한 것은 이영이었다. 운이 그렇게 하라고 시킨 까닭이다.
“이것은 무엇이옵니까?”
“의복이다.”
“네?”
“그런 것이 있다.”
내일 입궐할 때는 구멍 뚫린 속바지를 입고 오면 곤란했다. 수영을 위해 운은 일부러 새 속옷과 치마와 저고리를 준비했다.
저 가난한 처녀는 분명 내일도 오늘 입었던 남에게 빌린 노란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고 입궐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초간택에만 입으면 된다. 재간택, 삼간택에는 입고 싶은 옷을 입어도 된다.
다른 처녀들은 분명 화려한 의복을 입고 들어와 그 아름다움을 뽐내려고 들 것이다.
그 사이에서 임수영이 기가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아서 운이 일부러 의복을 준비해온 것이다.
“내일이 기대되는구나.”
즐겁게 웃으며 운이 돌아섰다.
주막에 이영만 남겨놓고 그렇게 운이 이현을 데리고 궐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주막에 남은 이영은 외진 곳에 있는 주막의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려던 수상한 자들 다섯 명을 내쫓았다.
운의 말대로 수상한 자들이 주막을 얼씬거렸고, 이영은 새벽까지 잠들지 않고 주막을 든든하게 지켰다.
물론 아침에 잠에서 깬 임수영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재간택의 날.
수영은 아침 일찍 일어나 찬물에 세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주모가 따뜻한 물을 준비해주는 바람에 따뜻한 물에 세수하고 아침밥까지 먹은 후, 이상한 보따리가 눈에 띄었다.
보따리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수영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뭐지? 누가 가져다 놓은 거지?’
궐문을 들어서며 수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저고리와 치마는 그 보따리 안에 들어 있던 것이다.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값비싼 비단으로 지은 옷이었다.
게다가 버선이며 속바지며 전부 새것들이었는데 무엇보다 몸에 딱 맞춘 것처럼 잘 맞았다.
솔직히 사또의 딸에게서 빌려온 옷은 어깨 품이나 가슴 품이 좀 넉넉했다. 사또의 딸에게 비하면 수영이 훨씬 말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옷은 딱 맞았다.
게다가 댕기도 새것이고, 당혜도 새것이다.
어제까지 수영은 짚신을 신고 있었고, 당혜를 신어본 적이 없다. 당혜의 값이 만만찮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따리 안에는 수영의 발에 딱 맞는 당혜도 들어 있었다.
‘발이 푹신해.’
푹신한 감촉을 즐기며 수영은 대비전으로 안내받았다.
어제 이 길을 걸을 때만 하더라도 두 번 다시 궐 안에 들어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또다시 이 길을 걷고 있다.
다음번에 이 길을 걸을 때는 궁녀로서 걷게 되는 것일까.
“.”
수영이 저와 함께 걷고 있는 다른 처녀들을 살짝 쳐다봤다.
모두 대단한 미인들에 도도한 기품을 품고 있었다.
어제는 처녀들이 여섯 명씩 조를 이루어 대비를 뵈었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 함께 가고 있는 다른 다섯 명의 처녀들은 전부 수영이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처녀들이 대비전의 마당에 이르자 푸른 옷을 입은 대비전 상궁이 처녀들에게 위로 올라오라 했다.
대비전 안으로 들어선 수영이 제일 끝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상석에 앉은 이들은 어제와 똑같았다. 왕대비와 옹주들이라고 했다.
옹주들은 선왕의 누이들로, 지금 임금의 고모들이다. 모두 출가하여 사가에 나가 있지만 왕실의 웃전들이라 간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제일 먼저 질문한 이는 왕대비였다.
왕대비는 유난히 한 처녀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누가 봐도 그 처녀를 어여삐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맨 끝줄에 앉은 수영이 왕대비의 바로 앞에 앉은 처녀를 살며시 훔쳐봤다.
콧날이 오뚝하고 살결이 눈처럼 희면서 속눈썹이 매우 긴 아름다운 처녀였다.
‘저 정도는 되어야 왕비가 되겠지?’
저렇게 고운 처녀가 교태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잘 어울렸다. 역시 왕비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톱 끝이 거칠고 손도 거칠다. 한겨울에도 찬 물에 손을 넣고 빨래하고 설거지를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떤 때는 나무도 직접 해오고 산에서 나물을 캘 때도 있어서 손이 고울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함께 품팔이하고 있지만, 한 달 중에 열흘은 수영 혼자 일했다.
아버지의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도 형편이 좋지 않아 며칠씩, 혹은 한 달이나 두 달 학비를 밀리게 되면 아무런 수입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굶어 죽을 수는 없어서 수영이 밤새 바느질하곤 했다.
평소보다 더 많은 삯바느질 감을 받아와 밤새 졸린 눈을 비벼가며 바느질하다 보면 어느새 눈이 감길 때도 있었고, 그러다 보면 어김없이 바늘로 손가락을 찌르곤 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상처들이 지금 수영의 손가락에 잔뜩 남아 있다. 꼭 곰보 자국처럼 열 손가락에 바늘 자국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잘 계실까.’
걱정되었다.
한양에 오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집에 남아 있던 보리쌀을 닥닥 긁어 판 것은 물론 양식을 사려고 모아둔 돈까지 수영의 손에 꼭 쥐여줬었다.
‘산 입에 거미줄 치겠니.’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지만 수영은 산 입에도 거미줄을 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걱정이었다.
딸이 한양 갈 여비를 마련해주고 부모님은 하루 한 끼만 겨우 드시고 계실 수도 있다.
운이 좋아 몇 달째 학비를 밀린 아이가 그 일부라도 갚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아마 지금쯤 집안은 무척이나 빈궁할 것이 뻔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여기에 왔는데 궐 구경만 잘하고 돌아가면 뭐가 남겠는가.
‘궁녀가 되어야지.’
뭐라도 얻으려면 궁녀가 되는 수밖에 없다.
혼자 잘 먹고 잘살자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함께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다.
‘이 옷은 비싸겠지? 당혜도 비싼 것이고. 재간택이 끝나면 이걸 팔까?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주모 아주머니에게 부탁하면 팔아줄까? 팔아주겠지?’
지금 수영의 생각은 온통 자신이 입고 있는 의복과 당혜에 관한 것뿐이었다.
이 귀한 비단옷을 입고 집까지 돌아가는 먼 여정을 걸어갈 수는 없다.
그러니까 집에 돌아가기 전에 이 옷을 팔고 당혜도 팔아서 돈으로 마련하는 것이 더 좋다.
궁녀가 된다고 해도 그게 하루아침에 결정될 일은 아닐 것이니, 일단 옷과 당혜를 팔아서 여비를 마련하고 남은 돈으로 집에 양식을 들여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대로 팔아도 되겠지?’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 수영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오늘 아침에 주막을 나서기 전에 주모에게 살며시 물어봤었다. 대체 누가 이 밥을 차려주라고 부탁했는지 말이다.
‘젊은 사내였는데 차림새가 아주 좋았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젊은 사내.
수영이 한양에서 알고 있는 젊은 사내는 운밖에 없다.
하지만 운이 그랬을 리는 없다.
일단 그가 자신이 그 주막에 묵고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 운이 아닌 다른 사내는 전혀 모른다.
그 의문의 젊은 사내는 왜 자신을 도와주는 걸까?
밥을 차려주고, 거기에 이 옷도 그 사내가 두고 간 것이 분명하다.
‘한양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
수영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툭툭.
누군가 수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수영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들어 제 어깨를 건드린 사람을 쳐다봤다.
상궁이었다.
무서운 표정의 상궁이 그녀를 노려보며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아.”
그제야 수영은 모든 차례가 다 끝나고 재간택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질문 하나 하지 않고 재간택이 끝났다.
초간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왕대비나 옹주들은 자신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아예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말도 안 돼!”
처녀 한 명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수영을 노려봤다.
지금 대비전의 상궁이 처녀들이 대기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와 재간택에서 합격점을 받고 삼간택에 참여하는 처녀들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 이름 중에 ‘임수영’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간택에서 떨어진 처녀들이 수영을 째려봤지만, 수영은 그 시선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녀 역시 엄청나게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제, 제가요?”
아니, 무슨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어떻게 삼간택에 오른단 말인가.
삼간택은 그야말로 대단한 집안의 대단히 아름답고 재치 있는 처녀들이 오르는 것인데, 자신이 삼간택에?
질문 한 번 못 받고, 내내 시선조차 받지 못했던 자신이? 왜? 어째서?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요! 어떻게 저런 것이 삼간택에 오르고 나는! 대비마마를 뵙고 부당함을 따지겠어요!”
자신은 삼간택에 들어갈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처녀가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펑펑 우는 처녀를 보며 수영이 적잖게 당황했다.
노골적으로 ‘저런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어서 기분이 나빴지만 그럴 만도 한 상황이라서 이해하기로 했다.
그런데 듣고 나니 기분이 나쁘다.
저런 것? 아니, 다 똑같은 사람 아닌가?
자기 집이 가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에게는 소중한 딸이다.
집안의 쌀을 전부 팔아서 한양으로 보내줄 정도로 사랑받고 있는 딸이다.
그런데 뭐? 저런 것? 저런 것?
“야!”
벌떡 일어난 수영이 소리를 질렀다.
펑펑 울고 있던 처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수영을 쳐다봤다. 처녀의 얼굴은 아직 눈물범벅이었다.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당장 사과 안 해?! 저런 것? 내가 저런 것이면 너는 그런 것이냐? 어? 어디서 저런 거래?”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수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처녀들이 당황해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러자 펑펑 울던 처녀가 악에 받쳐 다시 소리를 질렀다.
“어디 촌에서 올라온 가난뱅이 따위가! 내가 왜 너 같은 가난뱅이 촌뜨기에게 밀려나야 하는 건데!”
촌뜨기도 좋다. 가난뱅이라는 소리도 괜찮다. 그래, 그건 다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들어서 기분 나쁜 말을 계속 들으면, 얌전히 들어주던 쪽도 참을 수 없는 때가 있는 법이다.
어제도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조롱하는 시선을 계속 받았고, 오늘도 그 시선은 여전했다.
거기에 대비전에 있던 왕대비와 웃전들의 시선과 무시도 한몫 거들었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수영이 저를 향해 소리를 지르던 처녀를 향해 덤벼들었다.
“꺄아아악!”
“아아악!”
갑자기 벌어진 난투극에 처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전하.”
상전 지명이 사색이 되어 임금을 쳐다봤다. 운은 배를 잡고 웃는 중이었다.
관덕정에서 활을 쏘던 운은 조금 전 이현을 통해서 대비전의 간택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해 들었다.
막 과녁에 활을 겨누고 있던 운은 이현이 전하는 말을 듣고 활을 쏘는 것도 잊고 지금까지 내내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그 탓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은 상전 지명이었다.
재간택에 참여한 처녀들이 대기 중이던 방에서 처녀들끼리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싸움의 주범은 다름 아닌 임수영, 운이 뽑은 처녀였다.
왕대비나 다른 왕실의 웃전들이 전부 그 처녀는 아니라고 했지만, 운이 고집해서 재간택에 넣었다.
그리고 오늘 또 삼간택의 최종 후보로 그 이름이 적힌 종이를 뽑아 이 처녀를 삼간택에 들이겠다고 말했던 그 임수영이, 그 처녀가 엄청난 사건을 벌인 것이다.
“전하, 지금 왕대비마마께서는 임수영을 간택에서 제외해야 한다며 노발대발하고 계십니다.”
상전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이유로 간택에서 제외된다면 오늘 그 자리에 있었던 처녀들은 전부 간택에서 제외되어야지, 왜 임수영만 제외한단 말이냐. 그건 너무 부당한 것 아니냐?”
“하오나 다른 처녀들은 싸움을 건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그걸 누가 봤느냐? 일방적으로 당했는지 아니면 먼저 눈빛으로 싸움을 걸었는지 누가 알겠느냐. 원래 그런 일은 그 자리에 있었던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는 법이고, 여럿이서 입을 맞추면 한 명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 안 그러냐?”
“전하.”
웃음을 그친 운이 태연하게 활을 다시 들어 올렸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인데, 임수영이라고 안 꿈틀거리라는 법이 없지. 그 정도는 되어야 궐에서 버티지 않겠느냐.”
운이 활을 들어 과녁을 겨눴다. 과녁을 겨누는 시위의 끝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휙.
시위를 놓자마자 날아간 화살이 정확하게 과녁의 중심에 박혔다.
과녁의 중심에 박힌 화살이 그 끝을 떠는 것을 보며 운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생각보다, 잘 꿈틀거리는구나.”
그 말이 임수영을 향한 중얼거림이라는 것은 운의 뒤에 서 있는 이현과 이영만 알아들었다.
상전 지명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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