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서리 - 2. 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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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서리 - 2. 앓다

M 망가망가 0 2729

몸 서리 - 2. 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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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앓다






“이건 대체 무슨 약인가요?”




아침부터 달인 약을 담은 그릇을 입술에 대며 이령이 사내를 쳐다봤다.




날이 밝기 전부터 사내가 손수 이 약을 달인다는 것을 이령도 이제는 안다.


처음에는 무슨 약인지, 어디서 난 것인지도 모르고 약을 먹었지만 이제는 이 약을 사내가 직접 달인다는 것을 이령도 안다.


새벽 일찍 사내가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에 뭘 하느라 이렇게 일찍 일어나나 궁금하여 살며시 문을 열고 내다봤더니 마당 한쪽에서 사내가 약을 달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약이 무슨 약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위해서 지어 온 것이 틀림없다.


무슨 약인지 묻는 이령에게 사내는 대답 대신 잘게 자른 엿을 내밀었다.




이 사내의 하루 일과는 단출하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약을 달이고, 이령에게 먹일 아침밥을 준비한다. 그런 다음에 전날에 잡아 놓은 가축의 가죽을 다듬은 후에 칼과 도끼를 벼려 놓는다.




그즈음에 이령이 잠에서 깨면 이령이 아침밥과 약을 먹는 것을 꼭 확인한 후에 빈 물동이를 지고 나가 물을 길어 와 마당 안에 있는 큰 독을 채워 놓는다.


물을 다 채워 놓은 다음에는 이령에게 점심밥을 차려 주고, 집 뒤뜰에 마련되어 있는 도축장에 들어가서 아침에 벼려 놓은 칼과 도끼로 가축을 잡는 일을 한다.




해거름이 되면 사내는 화로에 불을 넣고 잡은 가축의 고기를 수레에 실어 집 밖으로 나갔다가 날이 어둑해진 다음에야 돌아왔다.


그리고 해가 지면 사내의 하루도 끝나 이령과 마주 앉아 저녁밥을 먹고 찬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한다.




그사이에 사내와 이령이 주고받는 대화는 없다.


이령은 사내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내가 왜 벙어리가 되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내가 말을 하지 못하는 이상 이령도 그 이유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백정 노릇을 하는 사내가 글을 알 리도 없었다.


글을 알지 못하니 글자로 의사소통을 할 수도 없고, 결국에는 이령이 필요한 것을 묻고 사내가 손짓으로 대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사내의 일과가 단순하니 이령의 일과는 더 단순했다.


그저 사내가 하는 것을 방 안에 앉아서 혹은 마루에 앉아서 지켜보는 것이 이령의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이곳이 낯서니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안일은 해 본 적이 없으니 무엇 하나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물을 길어 올 수도 없고, 빨래를 하는 법도 모른다.


불을 지피고 음식을 하는 법은 더더욱 모른다.


그래도 지루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것이, 사내의 모든 움직임이 이령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내에게는 사소한 집안일이고 평범한 행동이겠지만, 이령은 그 모든 것이 신기했다.


지금까지 이령은 제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화로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내의 행동을 지켜보며 그런 사소한 수고로움 끝에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이령은 신기했다.


그래서 사내가 도축한 고기를 내다 팔기 위해 수레를 끌고 집을 비우는 시간이면 그때부터 이령은 마루에 앉아서 해가 지도록 사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일이다.




그것이 이령이 지난 열흘 동안 한 일의 전부다.


온종일 사내의 행동을 구경하다가 사내가 집을 비우면 사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사내가 돌아오면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화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 잠이 드는 것.


그런 일상이 반복된 지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무슨 약인지는 알고 먹어야 하지 않나요?”




이렇게 물어도 사내는 대답을 해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해 주지 못한다.


그것을 이령도 안다.


알지만, 궁금하다. 대체 무슨 약을 열흘 동안 매일 하루에 두 번씩 먹게 하는 것일까.




사내의 대답을 포기한 이령이 약 그릇의 약을 전부 삼켰다.


그러고는 사내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엿 조각을 입에 넣었다. 쓴맛 뒤에 찾아오는 단맛은 더없이 달콤한 법이다.




“오늘 가져온 저 토끼들도 내일 잡을 건가요?”




오늘 사내는 빈 수레를 끌고 오며 토끼 몇 마리를 데리고 왔다.




사내는 도축한 고기를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나가서 소나 돼지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그 소나 돼지를 도축해서 다시 수레에 담아 가지고 나간다.


도축할 가축을 받아 와서 그것을 도축하고 고기를 가져다주는 것이 사내의 일이었다.




그런데 사내가 토끼를 가져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얀 털을 가진 토끼는 무척이나 예쁜 눈을 하고 있었고, 이령은 그 눈이 마음에 들었다.




이령의 질문에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도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키울 건가요?”




역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를 키울 거라는 사실에 이령이 환하게 웃었다.




이령은 동물을 키워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토끼라면 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키워도 되나요? 물론 키우는 법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령은 사내가 일부러 토끼를 가져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온종일 사내의 행동만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으니 무료할 것이라 생각해서 토끼를 가져온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저 토끼는 사내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인 셈이다. 비단이나 금은보석을 받는 것보다 몇 배나 기뻤다.




이곳에 온 후로 이령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웃자 사내의 눈매가 아주 조금 휘었다.


그녀의 웃음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것처럼 사내의 눈매가 기분 좋게 휘었다.




* * *




겨울이 다가와서 날은 무척이나 추웠지만, 다행스럽게 울타리 주변에 아직 토끼에게 먹일 풀이 남아 있었다.


아침밥을 먹은 직후 이령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울타리 주변의 풀을 뽑아서 토끼들에게 먹인 것이었다.




이령이 토끼에게 먹일 풀을 뜯는 사이에 사내는 토끼우리를 만들었다.


사내가 나무로 만든 우리 안에 토끼들을 넣어 두자 이령이 토끼들에게 풀을 먹였다.




“이것 봐요. 너무 잘 먹어요. 아삭아삭 소리를 내면서 먹고 있어요.”




제 손에 쥐고 있는 풀을 끝에서부터 아삭아삭 소리를 내 가며 먹는 토끼들을 쳐다보며 이령이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토끼는 모두 세 마리로, 전부 흰 털을 가지고 있었다.


눈은 빨간색이라 꼭 흰 비단에 붉은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다고 이령은 생각했다.




“지붕을 만들어 줘야 하지 않을까요? 곧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릴 텐데.”




사내가 만든 토끼우리는 지붕이 없다.


하지만 곧 겨울이다. 눈이 내리면 분명 토끼도 추울 거라고 이령이 걱정했다.




“그리고 겨울이 되어서 눈이 내리면 토끼에게 먹을 풀도 다 죽을 텐데 어쩌지. 이를 어쩌지.”




아직 눈이 내리기 전이지만 벌써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이령이었다.




이령이 하는 혼잣말을 듣던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따라오라는 뜻이다.




지난 열흘 동안 사내는 이령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항상 거리를 유지하고 떨어져 앉아 있거나 누워서 잠이 들고, 그녀에게 할 말이 있을 때면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곤 했다.


자신이 겁먹지 않게 이 사내가 최대한으로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이령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이 사내의 배려를 이령도 모르지 않는다.


처음 봤을 때는 저를 두고 혼자 성큼성큼 걸어가던 사내가 무척이나 야박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 역시 제가 무서워할 것이라 생각하고 일부러 거리를 뒀던 것이라는 걸 이령은 요즘에 와서야 깨닫고 있는 중이다.


사내가 이령을 데리고 간 곳은 울타리를 벗어나 집을 뒤로하고 야트막한 산을 조금 더 오른 곳이었다.




애초에 산이 높지 않았다. 그저 얕은 야산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령이 올라가기에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풀이 잔뜩 있네요.”




울타리 주변에는 토끼에게 먹일 풀이 조금밖에 없었지만, 사내가 데려와 준 산속에는 아직 새파란 풀이 잔뜩 남아 있었다.


토끼에게 먹일 것이 없어질까 봐 걱정하는 말을 듣고 일부러 여기까지 데려와 준 것이 틀림없다.




사내는 풀을 조금 뽑아서 그것을 터는 시늉을 했다. 이령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걸 뽑아서 털어요?”




이령이 사내가 한 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




사내가 손으로 머리 위의 해를 가리켰다. 그리고 손에 든 풀을 햇볕에 말리는 시늉을 했다.




“뽑아서 털어서 말려서.”




다시 사내가 풀을 뜯어 먹는 흉내를 내자 그제야 이령은 깨달았다.




“그러니까 풀을 뜯어서 햇볕에 말렸다가 나중에 토끼에게 먹이라는 건가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겨울에 눈이 내려도 토끼가 굶을 일은 없네요. 그럼 오늘부터 눈이 내릴 때까지 열심히 말려야겠어요. 겨울은 기니까요.”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 토끼를 키우게 되니 자연스럽게 해야 할 일들이 늘었다.




* * *




“피가!”




방으로 들어서는 사내의 손에서 뚝뚝 흐르는 붉은 피를 보며 이령이 소리를 질렀다.


가축을 도축하다가 칼날에 손을 벤 것이다.




“이를 어째.”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와 문갑에서 천을 꺼내 그것으로 피를 닦았지만, 이령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이령은 어려서부터 피를 무서워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열 살의 그 무서웠던 날에, 온 집 안에 검붉은 핏자국이 가득한 것을 본 기억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밤은 피로 물든 밤이었고,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은 이령에게서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 때문에 이령은 피만 보면 기겁했다.




사내가 다친 손은 하필이면 오른손이었다.


사내는 오른손잡이다.




상처가 엄청 깊은 것인지 아무리 천으로 닦아내도 피는 멎지 않았다.


사내는 문갑 안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더니 한 손으로 바늘에 실을 꿰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하지만 왼손 하나로 바늘에 실을 꿰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피를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었지만, 이령이 애써 용기를 내어 사내의 곁으로 다가앉았다.


그리고 사내의 손에서 바늘과 실을 빼앗았다.




“제가 할게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이렇게 다친 사람에게 뭘 어떻게 해 줘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바늘에 실을 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실은 명주실이었다. 가늘디가는 명주실을 바늘귀에 꿴 다음 이령이 그것을 사내에게 내밀었다.




푹-.




사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명주실을 꿴 바늘로 살을 찔렀다.


깊게 벤 손의 상처를 명주실로 꿰매는 사내를 보며 이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아프게 보였다.


분명 아플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조금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고 손의 상처를 명주실로 꿰맸다.


전부 꿰맨 다음 실을 끊고 그 상처 위에 천을 칭칭 감는 사내의 손에서 천을 받아 든 이령이 천의 끝을 매듭짓는 것을 도와주었다.




“상처가 곪지 않을까요?”




정말 이렇게만 해도 되는 것일까. 약을 바르거나 의원을 찾아가 보지 않아도 되는 걸까. 만약 상처가 잘못되어서 손을 잃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아무래도 의원에게 보여야 할 것 같은데.”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령은 내내 그 상처가 신경이 쓰였다.




그날, 사내는 손에 천을 감은 채로 한 손으로 수레를 끌고 기어이 도축한 고기를 가져다주고 해가 진 후에야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사내는 끙끙 앓았다.




이령은 사내가 앓는 것을 처음 봤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바위처럼 단단하고 또 커다란 나무처럼 든든해 보여서 도무지 아프다거나 쓰러지는 것을 상상도 못 했던 사내가 저녁밥에는 손도 대지 않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자려고 누워 등잔의 불을 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령은 사내의 앓는 소리를 들었다.




늘 듣던 고른 숨소리가 아니었다. 괴로운 듯 끊어서 쉬는 그런 숨소리였다.




“으, 으, 으.”




숨소리는 거칠었고, 앓는 소리는 힘들어 보였다.




결국 이령이 일어나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내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화로를 끌어당겨 어둠을 밝히고 들여다본 사내의 얼굴에는 온통 식은땀이 가득했다.




‘이마가 뜨거워.’




이마와 얼굴 그리고 손이 뜨거웠다.


얼굴과 손만 뜨거운 것이 아니었다. 옷자락을 살짝 들치고 만져 본 사내의 몸도 뜨거웠다.




펄펄 끓는 물에 담가 놓았다 빼낸 것처럼 사내의 몸이 뜨겁다는 걸 안 이령은 당황했다.


아픈 사람에게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이령은 전혀 알지 못했다.


열이 펄펄 끓는 사내에게 뭘 해야 하는 것일까.




‘열을 내려야 해.’




집 안에 약이 있는지 없는지 그건 모른다.


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약을 달이는 법도 모른다. 열을 내리는 약초 따위는 더더욱 모른다.




이령이 방문을 열었다.


밖은 어두웠다. 어두운 데다 바람까지 불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이령은 왈칵 밀려오는 무서움에 잠시 몸을 떨었다. 하지만 무섭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결국 이령은 있는 용기를 다 짜내 밖으로 나갔다.




한밤중에 사내 없이 혼자 밖으로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밤중에 깨어 볼일이 보고 싶어지면 늘 사내가 함께 나가 줬다.


그러나 지금은 앓고 있는 사내를 위해 자신이 용기를 내야 했다.


물독이 있는 곳으로 간 이령이 큰 그릇에 물을 담아 얼른 방으로 돌아왔다.




“하아, 하아.”




고작 물 한 그릇 떠온 것인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혼자 밖에 나갔다 온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물 좀 마셔 봐요.”




사내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사내는 깨지 않았다.


결국 이령이 깨끗한 천에 물을 적셔 사내의 입술을 벌리고 젖은 천의 물기를 짜냈다.




천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사내의 입술을 적시고 입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서 사내에게 물을 마시게 한 후에 이령이 물을 적신 천을 접어 사내의 이마에 얹었다.


자신이 열이 올랐을 때 몸종 은아가 그렇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잇.”




이령이 사내의 몸에서 옷을 벗겼다.




식은땀으로 다 젖은 사내의 옷을 안간힘을 써 가며 벗긴 다음, 열이 오르는 몸을 다른 젖은 천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령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사내의 이마에 얹은 물수건이 미지근해지면 그것을 새로 갈아 주고, 사내의 몸을 구석구석 차가운 물로 닦아 주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춥지 않을까 싶어 화로를 사내 곁에 놓아 준 다음에 불이 꺼지지 않게 가끔 화로를 뒤적이는 것.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손을 심하게 다쳤는데 열이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령은 처음 알았다.


이렇게 바위 같은 사내도 아플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전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던 자신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수염이 너무 길어.”




앓는 소리를 내며 괴로워하는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이령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카락은 한 번도 빗질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엉겨 붙었고, 수염은 얼굴 전체를 가릴 기세로 덥수룩했다.


이 수염 뒤에 감춰진 얼굴은 어떨까. 눈빛처럼 자상한 얼굴이 있지 않을까.




“얼른 나아요. 아프지 말아요.”




천을 칭칭 감은 사내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이령이 중얼거렸다.




사내의 손이 제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았다.


끙끙 앓으면서도, 열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도 마치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사내의 손이 제 손을 꼭 잡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이령은 생각했다.




* * *




사내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타는 것처럼 갈증이 일어 눈을 떴다.


아직 새벽이었다.


몸이 무거웠다.




‘앓았었나.’




어제 손을 다쳤다. 낫의 날을 너무 예리하게 벼린 바람에 탈이 났다. 돼지의 뒷다리를 잘라낸다는 것이 그만 손을 푹 찍어 버리고 말았다.


상처를 꿰매고 지혈을 하긴 했지만 상처가 너무 컸던 것인지 밤새 끙끙 앓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하룻밤 꼬박 앓으면서 땀을 잔뜩 흘리면 다음 날에는 몸이 가벼워진다. 지금은 아직 몸이 무겁지만, 이제 해가 뜨고 나면 한결 몸이 가벼워질 것이다.




‘응?’




그때 사내는 누가 제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이령이었다.


이령이 제 곁에서 제 손을 쥐고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것을 사내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화로에는 불이 거의 꺼져 가고 있었고, 이령이 평소에 덮던 이불은 사내의 몸 위에 있었다.


이불을 자신에게 덮어 주고 그녀는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옆에는 물이 담긴 그릇과 젖은 수건들이 뭉쳐진 채로 놓여 있었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떨어진 젖은 수건으로 밤새 그녀가 제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밤새 앓는 동안 제 곁에서 제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 주고, 젖은 천으로 제 몸을 닦아 주고, 제 손을 잡아 주었을 것이다.


추위도 많이 타는 여자가 이불까지 제게 덮어 주고 밤새 웅크리고 잠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사내는 그저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고뿔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사내가 웅크리고 있는 이령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줬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참 고운 여자다.




‘고생이겠지.’




이런 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여자다. 이런 곳에서 거칠고 투박한 음식을 먹고, 낡고 초라한 이불을 덮고, 이런 엉성한 집에서 살게 하기에는 너무 곱고 약한 여자다.




“큰일을 당해서 많이 놀랐을 거다. 놀란 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심병을 얻을 거라고 의원이 말하더구나. 한 달 동안은 매일 약을 달여서 먹이도록 하거라. 놀란 마음을 다스리는 약이다.”




칠 왕야 사독은 사내에게 약 첩을 내주며 그렇게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한 달이나 두 달이면 일이 끝나지 않겠느냐. 그러니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네가 보호해야 한다.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 울면 우는 대로 내버려 두거라. 울면 얼마나 울겠느냐.”




겉으로는 아내로 삼는다는 명목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진짜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사내는 안다.


이 여자의 지아비가 될 사내는 따로 있다. 진짜 정혼자는 따로 있고, 이 여자는 머잖아 그 정혼자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자신은 그때까지 이 여자를 지키면 된다.




칠 왕야 사독은 생명의 은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의 딸을 지켜 주는 것으로 은혜를 갚을 수 있지만, 이 일은 괴로운 일이다.


머잖아 시간이 되면 돌아가야 하는 여자에게 마음을 줘서는 안 된다.


정을 주면 안 되는 여자다.


여자는 돌아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자에게 줘 버린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정은 이곳에 혼자 남아 길고 긴 외로움에 괴로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을 주면 안 되는 여자인데 자꾸만 정을 주게 된다.


마음을 주면 안 되는 여자인데 자꾸만 마음이 머물게 된다.


온종일 자신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인 여자를 위해 소일거리라도 하라고 토끼를 가져다준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다. 이 작은 집에서 얼마나 혼자 살아왔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된 것은 이 여자가 처음이다. 비록 가짜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생긴 가족이다.


머잖아 돌아갈 여자이고, 머잖아 깨어질 관계이긴 하나 지금은 이 여자와 가족이고, 이 여자의 지아비가 자신이다.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지금은 자신이 이 여자의 지아비고 이 여자는 자신의 아내다.




한 달 혹은 두 달.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는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이 겨울을 영영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에서 이 겨울이 가장 따뜻했던 계절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덜컥.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새벽인데 밖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령을 쳐다보고 있던 사내가 조용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한 사내가 수레 옆에 서 있었다.


사내가 가져온 수레에는 칼과 창이 잔뜩 실려 있었다.




“손을 다쳤습니까?”




수레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도치의 오른손에 감긴 천을 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물어 왔다.




“별것 아니오.”




천을 두른 오른손을 힐끗 쳐다본 도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마 이령이 깨어 있었다면 제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벙어리인 줄 알았던 사내가 실은 벙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칼과 창을 실은 수레를 끌고 온 사내는 다름 아닌 자인이었다.


이령을 지키지 못한 죄로 양손이 잘려 이언궁에서 쫓겨났던 자인이 지금 두 손 모두 멀쩡한 채로 수레를 끌고 마당에 와 서 있었다.




“쇳독이 상처로 들어가서 조금 열이 올랐던 것뿐이오. 오늘은 그게 다요?”




“네.”




마당으로 내려선 도치가 자인이 끌고 온 수레를 집 뒤쪽에 있는 도축장으로 끌고 갔다.




도축장 안에는 어제 잡아 놓은 돼지와 소의 고기가 걸려 있었다.


빈 수레에 자인이 가져온 칼과 창을 실은 다음 그 위에 돼지와 소를 도축한 고기를 얹자 수레는 감쪽같이 고기만 실은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남았소?”




수레에 고기를 얹은 도치가 자인을 쳐다봤다.




“앞으로 열 번 정도 더 나르면 될 것 같습니다.”




“열 번이라.”




고기를 실은 수레인 것처럼 도성 안으로 무기를 실어 나른 지 벌써 한 달째다.




하루에 한 번씩, 서른 번도 넘었다. 꽤 많은 무기가 이미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앞으로 열흘.


이 정도의 무기라면 못 잡아도 천 명은 넘게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지금의 국법은 사병이 금지되어 있다.


왕족이나 귀족이라 할지라도 사병을 둘 수 있는 것은 집을 호위하고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한 용도로 고작해야 스무 명 안팎이다.




사병이 금지되어 있으니 당연히 병장기도 도성 안에서는 사사로이 지닐 수 없다.


허가를 받은 도검류만 몸에 지닐 수 있을 뿐, 귀족의 호위가 아니고 관의 무사가 아닌 자들은 사사로이 무기를 몸에 지니고 있다가 들키면 곧장 잡혀가게 된다.


황제가 황권을 지키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왕족과 귀족의 사병 양성 금지에 개인의 무기 소지 금지였다.




무기를 가질 수 없으면 반란을 일으킬 수가 없다.


병권은 황제가 손에 쥐고 있다.


도성 안에만 황제가 친히 지휘하는 친병들이 기천여 명에 이른다.




무기 소지 금지령과 사병 금지령이 풀리지 않는 이상 도성 안에는 대규모의 병사들이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도성은 동서남북의 거대한 문으로 둘러싸여 있고, 외부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병사들은 들어올 수가 없다.




가끔 변방을 지키는 팔위의 장군들이 도성으로 들어올 때도 병사들은 도성 밖에서 대기하고 장군들만 열 명 정도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입성할 수가 있다.


그 덕분에 황제는 벌써 20년째 황권을 무사히 지키고 있다. 그 악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의 황제는 열 명이 넘는 형제들과 숙부들까지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황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황후와 친자식들까지 거리낌 없이 죽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피를 많이 흘린 자들이 필연적으로 치르는 과정처럼 미신을 신봉했다.


황궁 안에 무당을 들여 무당을 통해 점을 치는 방식으로 스스로가 저지른 짓을 덮기를 원했고, 하늘이 자신을 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를 원했다.




미신이 성행하니 자연적으로 옳은 말을 하는 학자들이 귀양을 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황후나 후궁들 그리고 황제의 자식들도 때때로 그 희생양이 되고는 했다.




“아가씨는 어떠십니까?”




자인이 조심스레 이령의 안부를 물어 왔다.




“잘 지내고 있소.”




“눈물이 원체 많으신 분이라.”




“태자 전하께서는 언제 저분을 모시러 온다고 하오?”




“거사 일이 곧 정해질 겁니다. 일단 거사를 치른 후에 어느 정도 상황이 정돈되면 그때 모시러 올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아가씨는 마음이 약한 분이십니다. 겁도 많으시지만 또 걱정도 많으시지요. 만약 지금 왕야께서 위험한 일을 준비하는 것을 알게 되시면 분명 이곳에서 그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실 겁니다. 왕야께서 계획하고 있는 것이 뭔지 알게 되면 아가씨는 죽으면 죽었지 왕야의 곁을 절대로 떠나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방법으로 떼어 놓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겁탈당했다고 믿게 해서 말이지.”




“그런 이유가 아니면 아가씨를 무슨 명목으로 이언궁에서 내보내겠습니까. 황제에게는 또 뭐라고 변명을 하겠습니까.”




자인이 슬슬 밝아오는 새벽의 하늘을 쳐다봤다.




“날이 밝아오니 저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치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자인이 빈 수레를 끌고 돌아섰다.




울타리를 벗어나던 자인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레를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작은 초가집은 아직 새파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이령이 자고 있을 방문을 쳐다보는 자인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자인은 아직 이령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금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다.




수년을 모셔 온 아가씨다.


이곳에 보내진 것은 알고 있지만, 아직 만나 보지는 못했다.




칠 왕야 사독은 저 도치라는 사내를 믿고 있다고 했지만, 자인은 저 사내가 어떤 사내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왕야가 믿을 만한 사내라고 말하니 그 말을 믿을 뿐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령을 제 눈으로 보고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왕야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




그날 밤 이령을 겁탈한 것처럼 행동한 것은 자인이었다.


물론 칠 왕야 사독이 그리 시킨 것이다.


이령의 옷을 찢고, 그녀의 복부를 가격해서 기절을 시킨 것도 자신이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령은 자신이 겁탈당했다고 믿어야만 했고, 집안 하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어야만 했다.


지금 이언궁에서 일하는 하인들의 절반 이상은 황제가 심어 놓은 자들이다.


어떤 자들이 염탐꾼인지 알 도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를 속여야만 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자인 자신과 이령의 몸종이었던 은아 그리고 왕야 사독 외에는 없다.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신은 자유롭게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이령을 지키지 못한 죄로 손목이 잘려 쫓겨난 것처럼 보여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자인이 맡은 일은 병장기를 만드는 자들에게서 무기를 받아 이곳에 사는 도치라는 저 사내에게 무기를 건네는 일이다.




도치를 통해서 도성 안으로 반입된 무기들은 사독을 따르는 자들, 사독과 뜻을 같이한 자들에게 흩어 나눠질 예정이다.


그리고 한날한시에 일제히 봉기하여 황제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하늘을 세우는 것이 사독의 목적이다.




성공할 확률은 절반에 불과하다.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그 일에 가담한 모두가 죽는다.


사독이 이령을 이곳으로 보낸 것은 단순히 사독의 곁이 위험해서가 아니다. 만에 하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이령 한 명이라도 살리기 위해서다.




이곳에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아갈 수 있다.


거사가 실패해서 사독과 그를 따르던 자들이 모두 죽어도 이령은 이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 사독은 미리 포석을 깔아 놓은 것이다.




자인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새벽이 밝아오는 하늘은 어둠의 새파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은 어둡다.


하지만 머잖아 어둠이 걷히기만을 바랄 뿐이고, 그때까지 이령이 울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도치라는 저 사내가 이령을 부디 잘 지켜 주기를 바랄 뿐이다.




* * *




도치가 약탕기를 올려놓은 화로 앞에 앉아서 부채로 화로의 불을 키웠다.


그렇게 약을 달이고 있자니 방문이 소리를 내며 조금 열렸다.




조금 열린 방문 틈으로 얼굴을 내민 것은 이령이었다.


바깥의 날씨가 쌀쌀해서 이령의 코끝이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추운데 문 닫고 들어가 있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령에게 자신은 벙어리여야 한다.




굳이 벙어리로 보이려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그래야 이런저런 질문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 밤새 앓았어요.”




이령이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고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치도 안다.


밤새 앓은 주제에 이리 일찍 일어나서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타박을 주는 것이다.




마음이 여린 여자라서 타박도 저런 식으로밖에는 하지 못한다.


험한 세상을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을 그런 여자다.


사독이 걱정을 할 만하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내가 죽게 되면 그때는 네가 저 아이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사독은 그 말을 덧붙였다. 만에 하나!




그가 꾸미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도치도 안다. 그 ‘만에 하나’라는 일이 일어날 확률이 절반이 넘는다는 것도 안다.


그렇게 되어 사독이 죽으면, 그리고 태자도 죽으면 이령은 자신과 함께 영원히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


그때는 정말 이령이 제 아내가 되는 것이다. 일이 실패하면 이령은 제 아내가 되어 이곳에서 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 약은 당신이 먹어야 할 거예요.”




이령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불을 몸에 꽁꽁 두른 채로 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약을 달이는 도치를 쳐다봤다.




자신이 약을 달이는 것을 물끄러미 구경하는 이령을 쳐다본 도치가 손짓을 했다.


추우니까 방에 들어가라는 손짓이었지만 이령은 모르는 척했다.




그녀의 코끝이 빨갛게 물들더니 이내 콧물을 훌쩍였다.


새벽에서 아침이 될 때가 가장 추운 법이다.


이렇게 가장 추울 때 마루에 나와 앉아 있다니. 고뿔이 걸리려고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뭘까.




도치가 다시 손짓을 했다.


그래도 이령은 고개를 저었다. 참 고집스럽다.




“같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들어갈래요.”




도치가 약탕기를 쳐다봤다.




이제 약한 불에 뭉근하게 달이면 된다. 굳이 화로를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어쩔 수 없이 도치가 부채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그가 마루로 올라오자 그제야 이령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화로에는 조금 전에 나올 때보다 불씨가 조금 더 살아나 있었다.


방구석에 둔 장작을 이령이 화로 안에 몇 개 넣고 휘저은 덕분이었다.




“제가 불을 살렸어요.”




이령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화로의 불을 살린 스스로가 대견스러운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리로 와 보세요.”




이령이 도치에게 손짓을 했다.




“불은 같이 쬐어야 따뜻한 법이래요.”




화로 곁으로 사내를 가까이 오게 한 이령이 제 곁에 앉은 사내의 소매를 슬그머니 만졌다.




“옷에 왜 솜이 안 들어갔어요?”




어젯밤부터 그게 내내 신경이 쓰였던 이령이었다.




어제 끙끙 앓는 사내의 옷을 벗기며 이령은 사내의 옷에는 솜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사내는 계속 홑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춥잖아요.”




사내는 말이 없었다.




“고기를 팔아서 그 돈으로 다 뭘 한대요? 솜을 누빈 옷이나 좀 해 입지.”




그러면서 이령이 제 보따리 안에서 뭔가를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이언궁을 나오며 챙겨 온 패물 중의 하나였다. 금과 은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이령이 사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것으로 솜 누빈 옷이나 좀 해 입어요. 의원에 들러서 상처도 좀 보고 약도 좀 짓구요.”




그렇게 말하는 이령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머리 장식을 내미는 이령의 새빨개진 귀가 사내의 눈에는 그리 예뻐 보였다.


너무 예뻐서 이 여자가 정말 자신의 아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 버렸다.


차라리 사독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서 이 여자가 영영 자기 곁에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몹쓸 생각을 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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