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야도[夜盜] - 2. 탐색전
탐색전
버스 안에서부터 시작된 고난과 굴욕, 원 나잇을 가슴 한쪽 깊숙이 숨겨야 하는 욕정, 그것이 고난의 시작이었다면 은정과의 인연은 첫 만남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막 자정을 넘기고 있는 시간에 걷느라 파김치가 되어서 도착한 나만의 보금자리 원룸 자취방.
혹시나 해서 미리 방 정리라도 해 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와? 그래도 깨끗하게 해 놓고 살기는 하네요. 이 책들은 다 뭐에요?"
책장 가득한 수십 권의 책, 그중에서 영문 전공 서적 몇 권을 꺼내 펴더니 안경 너머로 두 눈을 반짝이면서 책장을 넘겨보고 있다.
"피! 깨끗하네. 전시용인가 보죠?"
가소로운 표정으로 피식 웃어 보이면, 힐끗 바라보는 저 얼굴, 처음 터미널에서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표정이다.
어쩐지 상대를 깔아보는 듯한 눈초리와 조소에 가까운 미소가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왠지 앞으로 갈 길이 멀었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난, 혼자 사는 남자들은 다 지저분 한 줄 알았는데 오빤, 달라도 많이 다른가 봐요?"
방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은근히 사람을 조롱하는 저 표정, 버스에서의 실수를 빌미로 약점 제대로 잡았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저 눈웃음.
마냥 숙맥인 줄 알았는데 저게 저런 면도 있었나 싶어서 대꾸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홱 몸을 돌리더니, 도도하게 핸드백을 챙겨 든다.
"씻는 데는 어디에요?"
"바로 나가서 왼쪽 문…"
한 시간 가깝게 죽어라 뛰다가 걷다가 집에 들어오니까 이젠 기운이 빠져서 말하기도 귀찮아진다.
은정도 내 대답이 성의 없다고 생각했는지 욕실로 들어가다가 힐끗 한번 돌아보더니, 욕실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근다.
…………………………
그러고 보니 저것은 버스에서 한 시간 넘게 퍼질러 잤으니 저렇게 쌩쌩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다른 승객들이 빤히 보고 듣는 버스 안에서, 조것에 무안을 당한 것도 모자라서 치한이냐고 몰아붙이던 악몽이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있을까? 피곤한 와중에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뭔가 계산에 착오가 있어도 단단히 있었든지 아니면, 은정이 저것이 백 년 묵은 여우든지, 둘 중 하나다.
그렇다고 이제 갓 스물두 살을 넘긴 아이를 백 년 묵은 여우로 단정을 짓자니 그도 뭔가 부족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갓 스물두 살짜리 녀석을 상대하면서 다정한 키스 한번 없이 너무 성급하게 손부터 대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버스 안에서 손바닥 그득히 펑 젖은 음부의 미끈거림과 그 사실을 숨기려고 안타깝게 애원하던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막무가내로 질구에 손을 넣어서 소녀의 자존심을 긁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손바닥 전체를 흠뻑 적셨던 기억을 떠올리자 다시금 기분이 좋아졌다.
슬쩍 얼마 전까지 애액으로 범벅이 되었던 손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덜 익은 감자의 채취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냄새를 확인하자, 갑자기 바지 아래쪽으로 피가 몰린다.
그러고 보니 버스에서 있는 동안 내내 바지 속에서 벌떡이던 흉물 놈이 저것의 젖은 속살 감촉에 환장해서 팬티 속에 겉물을 쏟아내던 일이 생각났다.
팬티 안은 벌써 다 말랐는지 찜찜한 기분만이 느껴졌다.
은정이 저것도 화장실에서 젖은 팬티를 빨고 있을까? 설마 이 방에서 노팬티로?
한참 동안을 행복한 상상으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슬쩍, 화장실로 사라진 은정의 눈치를 살폈다.
조용한 듯 싶더니 욕실 타일 위로 물소리가 쏟아진다.
오늘 밤 안으로 저것을 요리하기 전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은정이 나오기 전에 팬티를 갈아입어야 했다.
옷장에서 갈아입을 팬티를 꺼내 들고 바지를 내리기 시작했다.
신속하게 팬티를 갈아입고 반바지 추리닝에 한쪽 다리를 걸치는 순간 끼익, 낡은 방문 틈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거의 매일 듣는 소리지만 그렇게 소름이 끼치는 소리를 내면서 방문이 열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
"너! 또 덤비려고?"
후다닥 반 바지를 무릎 위로 올리고 있는데 막 욕실에서 나온 은정이 이것이 또 뭔 오해를 했는지, 이젠 완전 반말지거리다.
그리곤 방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에 있던 옷걸이라도 집어 던질 기세다. 아무리 오늘 일진이 사납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궤도를 벗어날 수가 있을까.
"아냐, 아냐! 왜 이래? 바지 갈아입는 중이었잖아. 넌 씻는다고 나갔고…"
일곱 살이나 어린 것한테 급하게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겁을 집어먹고 있는 상황.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정말 세상이 싫어진다.
"나 참. 떨기는. 내가 계속 지켜볼 거예요. 집에 가기 싫으니까, 잠깐 바람 쏘이려고 왔지, .오빠 좋아서 온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이제야, 별것 아닌 오해를 했다는 듯 책상 앞에 있던 의자를 당겨 털썩 주저앉는다. 마치 제 것처럼!
그리곤 본인이 생각해도 이 상황이 우스운지 마지막에 피식 미안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뭐, 먹을 것 없어요? 나, 배고픈데…"
"그래, 그래. 배고프지? 뭐 좀 먹을래?"
이 집의 안주인처럼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은정을 보면서 오직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난, 시원한 우유 한잔. 아, 케이크 한 조각도 같이 있으면 좋아요. 생크림 케이크면 더 좋고요."
"케이크? 케이크는 집에 없는데?"
라면이나 끓여줄 요량으로 둘러댄 말이었는데 카페테리아 음식을 선택하는 태도로 주문하는 저것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다시 가슴이 답답해진다.
게다가 냉장고 비운 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 우유나 빵이 있을 턱이 없었다.
시원한 우유? 프림 타서 얼음 띄워 주면 되나? 그렇다고 해도 이 밤중에 생크림 케익을 구해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저것의 당당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자꾸 바보가 되어 가는 기분이다.
"생크림 케익은 없는데…"
"집 앞에 편의점 있죠? 요즘 편의점에서도 케익 팔아요. 안 바쁘면 다녀와요. 아 참, 칫솔 챙겨오는 걸 깜빡했는데, 치솔도 부탁할게요."
"어, 그래. 그럼 내가 금방 다녀올게."
뻔뻔 지존의 등급을 마주하는 착각에 빠진다. 언제 또 편의점을 봐뒀는지 온종일 걷느라 더 이상 기운도 없는데 케익까지 사 오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 밖을 나서면서 어쩌다 이렇게 끌려다니게 되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치사하게 약점 하나를 잡고 흔들어 대고 있는 것 같다.
편의점에서 몇 개 진열해 놓은 케익을 고르고, 생수 몇 통과 우유에 칫솔까지 사 들고 가면서 아주 잠깐이지만, 뭔가 잊고 있었던 불안감에 빠져들어야 했다.
책상 앞 의자에 앉은 은정이, 그리고 컴퓨터!
기숙사를 나온 이후로 혼자 쓰는 컴퓨터는 로그인 암호를 없애 버린 지 오래였다.
부트할 때마다 암호를 입력해야 하는 귀차니즘, 그 작은 실수가 오늘의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편의점을 들러 원룸으로 돌아오기까지 채 십 분도 안 되는 시간을 짜증 섞인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그래, 오늘 계획에는 은정이를 자취방으로 데려올 것이라고 계산은 없었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불길한 예감은 편의점에서 상상했던 그대로 적중하고 말았다.
은정이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보라는 듯 방문 쪽으로 모니터를 돌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흥! 이건 뭐예요?"
"아… 하하…으… 은정아."
"저질! 몰래 이런 거나 보니까. 그렇게 아무 때나 덤비는 거 아니어욧."
거의 짐승을 보는듯한 눈빛과 저 냉소적인 표정.
이번에 석사과정을 마치고 나면 어엿한 지식인으로 대접받아도 모자랄 판에 대한민국 건전한 청년을 순식간에 인간 말종으로 깔아뭉개 놓고 있는 소녀.
이건 트집이 아니라, 한 인간의 인격을 말살시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어쩌다 이런 애를 만나서 완전 비극 수준이다!
"아냐, 아냐. 이건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거의 뛰어오다시피 급히 집에 오느라 도대체가 숨밖에 안 넘어간다.
"흥! 됐어요. 혼자 사는 남자들 그렇지 뭐…"
"하하. 그래, 그런 거 요즘 많이 보잖아."
"네? 참 내!"
갑자기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젠, 아예 분노에 가까운 표정으로 기가 막힌다는 듯 쏘아보는 저 눈빛!
"아, 아니, 하하. 요즘 그런 거 다른 사람들이 많이 보는 거야."
한국말에 주어를 생략하면 어떤 큰일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작은 말실수 하나에 거의 벌레 보듯 바라보고 있는 은정의 저 냉소적인 눈빛.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아, 변태! 자기만 보는 걸 가지고, 그걸 말이라고…"
"아, 자꾸 왜 그래.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 건데, 내가, 뭐 어린애냐?"
"이게 사생활이에요? 참 내!! 이런 사람을 내가 정말…"
"잠깐만, 오빠가 냉커피 아니, 냉우유 맛있게 만들어 줄게. 잠깐 있어…"
너무 당황한 나머지 대충 둘러대고 주방으로 도망치는데 등 뒤에서 들으라는 듯 혼잣말처럼 쫑알대는 은정.
"우유를 만들어 먹는 바보도 있나? 정말 바보 아니야?"
거의 도망치다시피 허겁지겁 주방에 와서 대한민국 지식인을 바보 병신으로 몰아붙이는 저것의 말을 듣자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바퀴벌레처럼 저 어린 것 앞에서 설설 기는 꼴이라니. 제기랄! 짜증이 나서 계획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저것을 쫓아내고 싶어진다.
…………………………
사 온 우유 팩을 뜯어 유리컵에 붓고 있는 중에도 어디 폴더인가, 끊임없이 마우스를 찍어 대는 저 끔찍한 소리!
사람마다 사생활이 있는 건데 도대체 어떻게 된 애가, 정말 저 어린 것을 너무 만만히 봤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저 마우스 소리만 들으면 자꾸 성질만 난다.
정신이라도 차리기 위해서, 냉장고에서 얼음 한 덩어리 입어 넣었다.
우두둑 우두둑, 얼음을 씹으면서 케익을 담을 접시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 안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슬쩍 방안을 훔쳐보았다.
헤드셋을 끼고 멍하니 모니터 화면에 빠진 소녀!
영화라도 보고 있나 생각하다가 모니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좀 더 고개를 내밀고 모니터를 주시했다.
최근에 특별히 백업해 두었던 아마추어 촬영물 화면을 바라보는 귀여운 얼굴이 꽤 심각해진 눈빛으로 살짝 인상을 쓰고 있다.
못 볼 것을 몰래 보고 있는 것처럼 표정도 거의 넋이 나가 있다.
저것이 나한테 별 트집을 다 잡더니 그래! 이 기회에 저것의 기를 한번 꺾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간의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계획을 떠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서 내 쪽을 째려본다.
마치, 진작부터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뭐해요, 거기서? 그러고 보니 훔쳐보는 취미도 있나 보죠?"
세상에 뭐 저런 것이! 진실을 왜곡해서 몰아붙이는 것도 정도가 있는데, 듣자 듣자 하니까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훔쳐보다니. 내가, 뭘? 그딴 거 안 볼 것처럼 하면서 모니터 돌려놓고 몰래 본건 너잖아?"
"이런 거 저장해 놓고 평소 몰래 본 장본인이 오빠 아니에요? 그리고 이딴 거 보면 다 오빠 같은 줄 알아요? 참 나!"
어느새 꽤 진지해진 얼굴에서 풀풀 날리는 싸늘한 냉기! 순간 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거의 한 인간의 인격을 박멸하는 살충제를 만난 벌레처럼 조용히 주방으로 사라져야 했다.
…………………………
컴퓨터 책상 위로 공손히 가져다 바친 우유 한 잔과 케익 한 접시.
정작 방주인은 방바닥에 앉아서 어색한 자세로 우유를 마시고 있는데 저것은 집주인처럼 의자에 편히 앉아서 입안에 케익을 넣고 오물거리고 있다.
가끔 우유를 마시다가 입술에 묻은 우유를 빨아가면서 경계의 눈빛으로 힐끔거리는 저 눈초리는 더더욱 기분이 나쁘다.
그것도 섹시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나를 내려보는 꼴이라니! 거의 한 마리 벌레를 지켜보고 있는 눈초리다.
무시해 버리기로 하고 입안에 케익을 넣고 씹고 있는데, 입안에서 문드러지는 빵 조각이 무슨 맛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우유 두 잔과 케익을 다 먹어 치운 은정이가 칫솔질한답시고 다시 욕실로 들어간 사이, 나름 수정된 궤도를 생각해야 했다.
이젠 더 이상 이렇게 멍청하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탄로 날 만한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심기일전! 독하게 마음먹고 있는데, 다시 한번 방문이 열리고 은정이가 방안에 들어선다.
"피곤해라. 나 자고 싶은데…"
"어? 그래? 그럼 자야지."
다시 은정을 마주하자 좀 전까지의 각오도 온데간데없이 군소리 한마디 못하고 이불을 깔아주곤 저만치 물러나 앉게 된다.
"미리 말해두는데, 잘 때 나 건드는 거 무지 싫어해요."
………………?
"멀리, 옆에서 떨어져 주무시고 저, 잘 때 손댔다간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무슨 소리! 날 어떻게 보고! 나 그런 놈 아니야. 왜 이래?"
"알았어요. 그럼 오빠 믿을 테니까…"
…………………………
"근데, 오빤 안 자요? 나, 잘 때 누가 쳐다보는 거 싫은데…"
"보기는 뭘, 누군 잠도 없는 줄 아나?"
"됐어요. 그럼 나, 낼 아침 첫차로 내려가야 해요. 수업이 있어요. 잘 자요."
이젠 나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다는 의미처럼,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벗어 핸드백에 챙겨 넣고는 이불 위에 눕더니 정말 보기 싫다는 제스처처럼, 기분 나쁘게 돌아눕는다.
"그래, 잘 자…"
…………………………
불을 끄고 잠을 청하려는데 온종일 그렇게 피곤하더니, 도대체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저만큼 누워있는 은정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이 방에서 지낸 삼 년 동안 아주 손쉽게 눕힌 처자가 자그마치 셋인데, 도대체가 꼼짝할 수가 없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모텔 침대 위에서 저 어린 것을 안고 그동안 익힌 기술을 다 퍼부어서 공략하는 건데, 자꾸 억울한 사건들만 떠오른다.
살다 보니 이럴 수도 있나. 이 귀한 밤에 바보같이 잠을 청하고 있다니.
하지만, 낮 동안에 쌓였던 스트레스와 피로가 단번에 몰려왔다.
막, 선잠이 들어서고 있는데, 휴대폰 진동음이 내 의식을 깨웠다.
은정이 깰세라 어둠 속에서 급히 바지를 뒤지고 방바닥을 헤매다가 겨우 찾은 휴대폰에는 아무런 부재중 수신메시지가 없었다.
힐끗, 은정이 쪽을 돌아보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미동도 없다.
드르륵, 드르륵. 두세 번 끊임없는 진동이 이어졌다.
휴대폰 진동음의 주인이 내 것은 아니지만, 이걸 깨워야 하나? 저 탱크 소리 같은 진동에도 곤히 잠을 자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바꿨다.
슬금슬금 다가가서 조용히 핸드백을 열고 휴대폰을 꺼내어 보았다.
휴대폰 외부 액정에 표시된 부재중 수신 전화만 열일곱 통! 새로 받은 메시지 열 개!
누굴까 하는 호기심으로 슬쩍 은정을 노려봤다. 어느새 진동은 멈춰 있었다.
윙, 손안에서 진동이 울리고 다시 문자 하나가 새로 도착했다.
밤새 울리도록 켜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핸드폰 폴더를 열어봤다.
전원 오프 버튼을 누르겠다고 열었던 휴대폰인데 부재중 전화 발신자 이름이‘신랑’으로 뜬다.
어쭈? 저, 저게 결혼했나?
무시해 버리려고 했는데, 언뜻 보게 된 발신 이름이 눈에 밟힌다.
그리고 은정에게 당한 수모가 떠올랐다.
볼 건 봐야지!
그리고 단숨에 메시지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아주 나가 살 작정이야? 지금 거기 어디야? 당장 안 기어들어 와? 후회하게 만들어 줄까? ’
‘쥐새끼 같은 년. 그렇게 몰래 들어와서 포맷시켜 놓고 나가면 그거 다 날아간 줄 알지?’
‘너 어디야! 이게 진짜! 네가 나를 안 보고 살 수 있을 거 같아?’
‘마지막이다! 당장 전화 안 받으면 각오해!!’
‘내가 너한테 그 정도밖에 안 됐어? 도망갈 수 있으면 가봐! 후회하게 해주겠어!!’
‘넌 애가 싸가지가 없어. 넌, 좆질 없이 살 수 없는 년인 거 몰라?’
‘개 같은 년! 두고 보자!’
…………………………
버스에서 당한 수모 이후로 뭔가 다른 복수의 기회를 기대했는데 예상 밖으로 정말 신랑인지 애인인지, 그놈의 상스러운 욕뿐.
새삼 은정의 얼굴을 훔쳐보곤 설마, 저 앳된 얼굴이 유부녀?
아직 학생인데 설마, 요즘 학생들 사이에 동거가 유행이라던데 그럼, 동거 관계? 사실일까? 신랑?
새로 받은 메시지 외에는 보관 메시지는 없었다.
두서없이 읽은 내용으로 봐선 이 여우가 나 말고, 또 누구 속을 긁었나 본데, 어디 가서 횡포를 부리고 도망 왔나?
"뭔 잘못을 했길래 나 참, 뭐 이런 자식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심으로 중얼거리게 된다.
동거 사이? 도도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이런 새끼하고 살면서, 이런 노리개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서 이제 이걸 어쩌나 하는 걱정이 또 앞선다.
보관 문자를 본다는 게 새로 온 문자를 읽어 놨으니 분, 확인된 문자를 보면 또 다그칠 텐데.
바보같이 그 순간, 나는 아예 삭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에이! 모르겠다.
조용히 휴대폰 전원을 꺼두고, 원래 있던 곳에 넣어 두려고 핸드백을 열었다. 그리고, 좀 전까지 켜두었던 휴대폰 불빛에 비치는 하얀 천 조각!
한눈에 봐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면서 마른침이 넘어간다.
자는 은정의 호흡 상태를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이 바보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정말 업어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괜히 측은한 마음마저 든다.
하지만, 두 근 반 세 근 반으로 뛰는 가슴은 진정될 리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핸드백에 고이 접어 둔 천 조각을 덥석 손에 쥐었다.
짜릿했다. 밀폐된 공간에 보관해서인지 지금도 팬티는 젖어 있었다. 푹 익은 감자 냄새가 싸하게 코를 찌른다.
어쩌다 내 손을 타서 이렇게 젖었나? 흐뭇한 웃음이 나온다.
얼마나 흘렀던지 팬티 아래쪽까지 고인 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문득, 곤히 잠에 빠져 있는 은정을 돌아보다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럼, 지금은 노팬티?
훅, 하는 뜨거운 기운이 아랫도리에서 솟구쳤다. 그리고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은정을 처음 만나고 오늘 하루의 사건들.
누군지 모르는 놈팡이 애인 놈과 요 앙큼한 소녀.
괘씸하지만, 측은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면서 적어도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내 공간, 내 보금자리에 이 어린 것과 단둘이 있다는 사실!
그것도 팬티를 입었는지, 어쩌면 빈속으로 치마만 입고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인.
내 방 이불 위에 모로 누운 뽀얀 종아리 뒤태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내 몸이 발정 난 수캐처럼 심장에 뜨거운 피가 솟구치고 몸이 떨린다.
…………………………
어차피 동거 관계 그 이상의 경험 있는 소녀라면 이번 기회에 그 못된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에게서 하룻밤을 빼앗고 싶었다.
다시 놈이 보낸 문자 메시지가 떠오르면서 뭔가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욕구가 더욱 간절해졌다.
내일의 태양이 뜨면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 할지도 모르는 인연.
어디서부터인지 자신감이 솟구쳤다.
모로 누운 자그마한 얼굴과 탐스러운 볼살.
아직 소녀티를 벗지 않아서 온몸 곳곳에서 뽀얗게 빛을 발하는 젖살.
보면 볼수록 참 이쁘장한데 무슨 잘못을 한 건지, 어쩌다 그런 놈을 만나서.
요 앙큼한 것이 그동안 나를 경계하는 이유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응? 오빠. 오빠."
잠깐의 긴장과 평화로운 정적이 흘렀다.
살짝 놀라긴 했지만 잠결에 누굴 부르는지 알 수가 없다.
깼나?
우선, 팬티와 핸드백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놓고 서서히 은정에게 접근했다.
"은정아. 일어났어?"
…………………………
결심이 서니까 기분도 이렇게 담담해지는 건가? 잠꼬대 중인지 옹알이 같은 숨소리뿐, 대답이 없다.
"은정아. 안자면 잠깐 일어나 볼래? 오빠가 은정이에 할 말이 있어."
역시 아무 대답 없었다. 바보. 이거도 인연인데, 네가 날 잡을 수 없다면 내가 널 잡아 줄게. 정, 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때 가서 내가 차여 주면 되지 뭐.
기왕 깨울 거, 나중에 무슨 구박을 당하더라도 실컷 만져 보다가 행복하게 맞아 죽겠어.
그래, 인생 뭐 있겠어? 경찰서라도 가자면, 가 주겠어!
…………………………
그렇게 한참 동안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다가 인제 와서 심장이 터져 나갈 정도로 두근거리는 건 왜일까?
그래, 이번엔 좀 더 완벽한 계획을 준비해서 실행해 옮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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