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10장(3)
희민이 그런 생각을 하며 석호를 가만히 바라봤다.
외모는 평범했다. 안경 낀 평범한 회사원 이미지.
회사 동기이고 처음엔 같은 부서에 있어서 편하게 지냈는데 이성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그런 상대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까 서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식으로 생각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야. 그건 석호 씨에게 민폐지.’
자신은 이렇게 됐지만 석호는 멀쩡히 회사에 잘 다니고 있었고 만약 자신과 그런 관계가 된다면 회사에는 숨겨야 할 거였다.
불편해질 것이 뻔한데 희민은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이해해. 석호 씨.”
희민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석호에게 담백하게 웃어 줬다. 석호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라도 내가 도움 될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와줄게. 그게 내 죄책감 줄이는 방법이니까 불편해하지 말고 필요할 땐 언제든 연락해.”
“그럴게. 고마워.”
식사를 마치고 희민이 계산하는 사이 석호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문 밖으로 보이는 석호에게 잠시 시선을 두다가 카드를 받아 드는데 뒤에 서 있는 여자들이 하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밖에 남자 괜찮지.”
“응. 괜찮네. 스마트하고. 근데 애인 있을걸? 아까 여자랑 있는 거 같던데?”
그 여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지 숙덕이는 목소리를 듣던 희민이 조용히 영수증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석호를 보니 뒤에서 시선이 꽂히는 것 같았다.
“주차장으로 갈 거지?”
“응.”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희민은 속으로 생각했다.
‘잘생긴 거였구나.’
그러고 보니 전엔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방금 전엔 평범하다고 생각한 걸까?
‘아…….’
그 남자 때문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조각처럼 수려한 얼굴에 희민은 스스로 납득함과 동시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건 그 남자가 지나친 거야. 비교 대상이 되면 안 돼.’
희민이 저도 모르게 눈썹을 모으는데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자 석호가 그녀 앞에 섰다.
“오늘 잘 먹었어. 걱정되니까 종종 연락해야 돼. 꼭.”
“응. 그럴게.”
다정한 미소에 대답한 희민이 차를 세워 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 비싸지 않더라도 석호에게 뭔가 보답을 했다는 생각에 희민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차 운전석에 몸을 실은 희민이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곧 그녀의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한쪽에 숨어 있던 차 한 대가 기다렸다는 듯 움직여 뒤따라 밖으로 빠져나갔다.
***
“처음 뵙겠습니다. 한희민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이규태입니다.”
희민을 본 남자의 얼굴에 단번에 화색이 돌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미인이었던 모양인지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싱글벙글한 남자 앞에서 희민은 조용히 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와, 그 업체 갑자기 믿을 만해지네요. 지금까진 영 아니었는데 광고에 붙여 놓은 미인 사진에 확 신뢰감이 생기네. 혹시 거기 고용된 직원분은 아니시죠?”
“그런 거 아니에요.”
희민이 감정 없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이 네 번째 매칭이었다.
서희의 말대로 소개팅이든 선이든 볼 마음은 있었지만 문제는 그 일이 있은 뒤 자신에게 소개팅해 보라고 제안하던 모든 사람들과 연락이 끊겼다는 거였다.
서희에게 말하면 분명 일가친척을 끌어들여 줄줄이 남자를 소개시켜 주겠지만 지금 자신의 상황에선 그게 불편했다.
이쪽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일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고, 그래서 그걸 피하려 결혼 정보 회사에 등록했다.
물론 프로필도 가짜로 만들었지만 희민의 사진과 조건을 본 업체에선 곧바로 매칭을 시작했다.
희민의 조건은 딱 하나, 남자의 연봉이나 모든 조건은 상관없이 그저 자영업자여야 된다는 거였다.
무직도 괜찮으니 회사원만 아니면 된다는 조건이었다.
혹시나 같은 업계 사람을 만날까 봐 그렇게 한 거였는데 다행히 지금까지 네 번 매칭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자신을 아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이러면 되겠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희민이 남자의 말에 의무상 웃어 주며 생각했다.
결혼 생각을 가지고 이 업체에 프로필을 등록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남자를 만나는 일이 서희에게 기쁨을 준다면 당분간 열중할 생각이었다.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될 수도 있는 거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연애나 결혼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었다.
‘……끔찍해. 남자라는 건.’
희민이 잠시 머릿속에 한 남자를 떠올리고 조용히 진저리 치고 있는데 차를 마시던 규태가 말했다.
“희민 씨는 충분히 인기가 있으실 것 같은데 왜 이런 업체에 등록하셨어요?”
똑같은 질문을 네 번째 받는 거라 희민은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제 업계 외에 좀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보고 싶어서요.”
“아, 희민 씨 무슨 일 하신다고 하셨죠?”
계속 마음에 안 드는 여자만 나오다 보니 이젠 프로필도 대강 보고 나온 상태라 정보가 없다는 게 통탄스럽다는 듯 규태가 관심을 보였다.
“그냥 회사 다니다가 잠깐 쉬고 있어요.”
“아아. 그렇구나. 오래 일하면 쉬는 것도 필요하죠.”
규태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
희민은 조용히 차를 마셨다. 보통 그만뒀다고 하면 전 직장까진 물어보지 않는다.
자신이 말한 게 거짓말은 아니지만 희민은 가슴 안에 작은 돌덩이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이 업체에 등록하기 위해 가짜 프로필을 생성할 때도 그랬지만 거짓말은 언제나 불편하다.
그 일 이후로 서희에게도 내내 거짓말을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는데 이런 사소한 거짓말까지 하려니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밀려드는 회의감을 지그시 참아 누르는데 규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식사라도 하러 갈까요?”
“네. 그래요.”
희민은 익숙해진 매칭 코스대로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근처에서 식사하며 시간을 때우다가 술 마시자고 하면 적당히 둘러댄 뒤 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지면 끝.
연락이 오더라도 몇 번 피하면 더는 연락이 오지 않는다.
이런 무료한 만남인데도 서희는 희민이 이번에 만난 남자의 이름만 말해도 눈을 빛냈다.
적어도 희민이 없는 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서희는 늘 기대감에 차서 묻곤 했다.
‘어떤 남자야? 성격은 다정해?’
한 번 만나고 안 만나는 남자들인데도 서희는 그 남자가 다정한지를 궁금해했다.
그런 남자가 희민에게 잘해 준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럴 때의 서희는 건강한 사람처럼 활력이 넘쳤다.
비쩍 마른 고목 같은 서희의 얼굴에 생기를 줄 수만 있다면 희민은 이 무료한 만남을 백 번이든 천 번이든 할 수 있었다.
“희민 씨?”
“아, 네.”
멍하니 서 있던 희민은 자신을 부르는 규태의 목소리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끈질겼던 남자의 성격 때문에 희민은 억지로 칵테일 한 잔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야 했다.
딱 한 잔만 같이 마셔 주면 안 되냐고 30분을 애원하다시피 한 남자는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고 희민의 번호까지 따낸 뒤 기분 좋게 돌아갔다.
“……하아.”
하지만 희민은 완전 기가 빨린 사람처럼 소파에 걸터앉았다.
피곤해.
하얀 손으로 이마를 짚은 희민이 길게 숨을 토해 냈다. 평생을 쫓기듯이 살았다.
학생 때는 공부, 취업한 뒤엔 일, 자신의 일에 성과를 내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다.
큰 프로젝트를 맡아 연달아 성공시키고 회사에서 자신의 자리가 커져 갈수록 성취감도 느꼈다.
사실 머리가 좋다고는 하지만 기억력이 좀 좋을 뿐 그녀는 누구보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 노력이 조금 좋은 머리 때문에 별거 아닌 취급을 당할 때도 많았지만 뛰어난 성적도, 회사에서 이룬 성과도 희민 스스로 쌓아 올린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력을 다했던 회사에서 내쳐진 뒤 그 공들여 쌓은 커리어는 물거품처럼 사라져 있었다.
겨우 지옥에서 끌려 나와 보니 허무해졌다. 그나마 살 만해진 모양이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걸 보면.
‘다른 일을…… 해 볼까.’
희민이 피곤으로 물든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생각했다.
뭔가 다른 열중할 만한 일을 찾으면 매일 해저를 떠도는 듯한 가라앉은 기분이 나아질까.
지잉.
진동 소리에 희민이 휴대폰을 꺼냈다. 남 실장의 문자가 와 있었다.
[메일로 참고인 조사 명단 보내 놨으니 빠진 사람 있는지 확인해서 답장 바랍니다.]
‘참고인 조사……. 재판 때 말이구나. 그때 누가 있었더라.’
희민이 눈을 가늘이고 기억을 더듬었다.
남 실장에게서 연락은 주기적으로 오고 있었다. 주로 뭔가 확인하는 연락이었다.
그때마다 그 일을 다시 떠올려야 해서 고통스러운 부분은 있었지만 희민은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지만 조만간 형체는 파악될 거였다.
그녀가 고용한 남 실장으로 불리는 남자는 이 업계에서 굉장한 전문가라고 알고 있으니까.
우습게도 남 실장에 대해 알게 된 건 교도소에서였다.
사람을 찾거나 떼인 돈 받는 수준을 넘어 기업 간 비리도 그 남자가 나서면 못 캐는 게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쪽 바닥에선 이미 유명한 모양이었다.
웬만한 비용으론 꿈도 못 꿀 정도로 비싼 사람이라 쉽게 고용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충고도 들었다.
‘그 안에서 얻은 정보 중에 이런 쓸모 있는 게 있을 줄은 몰랐지만.’
쓴웃음을 지은 희민이 휴대폰으로 남 실장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러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시계를 확인했다.
‘내일부터는 할 일을 찾아보자.’
그 전의 자신을 모르는 세계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뭐가 됐든 간에 일단 시작하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물속을 부유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뭐든 해 보면 힘이 날 거야.’
그렇게 생각한 희민이 기운 없는 몸을 일으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
우뚝.
순간 드레스룸으로 향하던 희민의 걸음이 멈췄다.
억지로 잊은 기억들이 깊은 내부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에 그녀는 습관처럼 그 기억을 다시 묻었다.
떠오르지 못하도록 깊이 묻어 둔 희민이 다시 걸어갔다. 쫓기는 사람처럼 그녀의 걸음이 빨라져 있었다.
“하읏……!”
또 그 남자다. 남자가 터질 듯 펌핑 된 가슴 근육을 들썩이며 엎드린 여자를 집요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침대 위에 흥건하게 젖은 자국들이 이미 장시간 행위가 이어졌다는 걸 보여 줬다.
땀에 젖은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잡은 남자가 뒤에서 사납게 허리를 밀어 올릴 때마다 여자의 긴 머리칼이 정신없이 나부꼈다.
“흐, 앗, 아앗!”
한껏 뜨거워진 여자의 내부가 굵게 찌르고 들어오는 남성에 진저리를 치며 조여들었다.
여자가 다급하게 신음을 터뜨리며 몸부림쳤지만 남자는 땀에 번들거리는 육감적인 근육질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며 여자를 괴롭혔다.
“시, 싫어, 이젠, 더는 싫어……!”
결국 여자가 흐느끼며 도리질 치기 시작했다. 시트를 움켜잡고 쾌락을 견디지 못해 눈물을 쏟는 여자를 남자가 위에서 내려다봤다.
“싫은 거 아니잖아.”
낮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은 서정혁이었다.
“……아! 아앗!”
정혁이 더 세게 쑤셔 박기 시작하자 여자의 몸이 앞뒤로 크게 출렁였다.
“좋아하잖아. 지금 이렇게.”
“아흣……!”
퍽퍽 쑤셔 박던 정혁이 그녀의 애액으로 흠뻑 젖어 있는 자신의 꿈틀대는 페니스를 느릿하게 빼냈다.
뭉툭한 귀두로 길게 내부를 긁으며 빠져나가는 감각에 여자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다 빼기도 전에 이렇게 안달 낼 거면서.”
피식 웃은 정혁이 저도 모르게 한껏 뒤로 빼낸 여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철썩!
“아아!”
철썩! 철썩!
“읏! 아아!”
벌을 주듯 손바닥 자국이 남도록 때린 정혁이 가늘게 경련하는 엉덩이를 꽉 쥐고 끄트머리만 걸쳐져 있던 빳빳한 페니스를 푹 찔러 넣었다.
“하윽……!”
쾌감에 짓이겨진 목소리가 시트를 움켜잡고 고개를 한껏 치켜올린 여자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굵은 몸체를 한껏 물고 조이는 그녀의 속살에서 열락의 애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꽉 물고 있어. 이번에도 몸과 다른 소리를 내뱉으면 정말 빼 버릴 거니까.”
위협적으로 말한 정혁이 다시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읏! 핫! 아아……!”
교태스러운 신음 소리와 함께 쳐올린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여자는 희민 자신이 아닌, 처음 보는 여자였다.
“!”
희민이 눈을 번쩍 떴다.
“하, 하아.”
꿈처럼 거친 숨결이 자신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캄캄한 방 안을 보던 희민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또 그 남자 꿈을…….’
요즘 서정혁의 꿈을 자주 꿨다. 억지로 묻어 버린 기억이 이런 식으로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꿈에선 항상 그 저택에서 그 남자와 했던 정사가 펼쳐졌는데, 마지막에 보이는 얼굴은 늘 자신이 아니었다.
그 얼굴은 매번 바뀌었고 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번엔 다를 겁니다. 말씀드린 대로, 회장님과 더 잘 맞는 사람으로 찾았으니까요.’
차 실장이 구했다던 그 여자…….
지금 그의 저택에 있을 자신보다 그와 잘 맞을 여자. 아마 서정혁이 저와 했던 것처럼 그 여자와 관계를 갖는 장면을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상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자꾸 이런 꿈을 꾸는 건.
인상을 찡그린 희민이 뒤척이며 침대 위에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
등 뒤가 허전했다. 우습게도 단 몇 달을 그 남자에게 잡혀 잠들었다는 이유로 새벽에 깰 때마다 등 뒤가 허전함을 느끼게 됐다.
금방 원래처럼 혼자 자는 데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허전함이 점점 커지는 게 어이가 없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희민은 눈을 꼭 감은 채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꽉 막힌 듯 답답한 가슴을 손으로 세게 누르고 있었다. 마치 습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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