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포효 10
“찾아오길 기다렸는데 결국 이 노인네가 찾아오게 하는군.”
“죄송합니다.”
“진선이 말로는 날 찾아올 거라고 했던데?”
“바빴습니다.”
“일이 우선인 건가? 진선이는 뒷전이고?”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이미 그 사람하고는 끝났습니다.”
“진선이는 아니던데.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하더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나한테는 의논 한마디도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는 천하태평이군. 내가 그렇게 우스운가? 우리 진선이 배경을 보고 접근했던 건가?”
담운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지고 표정은 굳어갔다. 그런 큰일을 저질러놓고 시침 뚝 떼고 있었던 효준이 괘씸했다.
그래도 진선이 다시 합치기를 원하고 있으니 심하게 할 수는 없었다.
“대답해 보게.”
“철없는 나이에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뭐가 어째?”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꿈을 펼쳐보고 싶다는 이유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습니다.”
“이런 나쁜 놈! 자네가 진선이를 얻어서 손에 넣은 것들이 얼만가? 지금 이 청음을 가진 것도 진선이의 덕이라는 걸 모르나?”
“청음은 제가 일궈낸 겁니다.”
“그 바탕은 뭔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네가 이 청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는가 말이네. 진선이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과연 자네가 이 청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제 능력이라면 시간은 더 오래 걸렸어도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건방진 자식!”
효준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담운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비굴해지고 싶지 않았다.
담운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능력을 인정해주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끔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진선이의 부친인 이상 팔은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지는 않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의논을 드리기에는 집사람과 전 너무 멀리 간 상태였습니다. 의논을 드렸으면 아버님께서는 절대 이혼 못 하게 하셨을 겁니다.”
“그랬겠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말 집사람과는 같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왜? 뭐가 그렇게 진선이를 미워하게 했는가?”
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선을 이해할 수 없었고, 용서할 수도 없지만, 치부를 아버지인 담운에게 말할 순 없었다.
“그냥 저희 관계는 여기까지라고 이해해주십시오.”
“진선이가 자네를 원한다고.”
“저는 아닙니다.”
“자네, 정말 이렇게 나올 건가? 내가 자네를 얼마나 믿었는지 알면서 나한테 이럴 건가?”
“아버님의 지지가 제게는 정말 큰 힘이었습니다. 아버님 덕에 큰일도 할 수 있었고요.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아버님.”
효준의 미간이 좁혀졌다. 담운을 이해시키려면 끝까지 가야 하는 건가 싶었다. 담운을 찾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진선의 치부를 드러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담운을 찾는 것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애가 있었다면 달랐을 텐데 말이야. 자네 여자 있나?”
담운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진선이 말했을 줄 알았기에 효준도 놀라지 않았다.
“진선이 만나기 전에 만나던 여잡니다.”
“그 여자하고 시작할 생각인가?”
이번 물음에도 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희수에게 어떤 불똥이 튈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내가 자네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 있다는 건 잘 알 걸세. 경거망동하지 말게.”
“진선이와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당돌한 물음에 담운은 효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상하게 효준에게 아들 같은 감정을 느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건방지게 구는 효준인데도 밉지 않았다.
어째서 진선이 이 상황의 원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선이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정당한 이유를 말하게. 그러지 않으면 자네는 그 여자와도 다시 시작하지 못할 걸세.”
“진선이한테 물으십시오.”
“설령 진선이가 화근이라고 해도 그 애가 사실대로 말하겠나? 자넨 진선이를 그렇게 모르나? 내가 딸을 잘못 키웠다는 걸 새삼 실감하고 있네.”
“그래도 진선이에게 직접 들으셔야 할 사실들입니다.”
“사실들? 이유가 여러 가지라는 건가?”
뜻밖의 말에 놀란 듯 되묻는 담운이 애처롭게 보였다. 진선이 저지른 일들을 알게 되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면 담운을 봐서라도 묻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담운이 빤히 쳐다보는데도 효준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모니터를 응시하던 희수는 슬쩍 효준을 훔쳐봤다.
일에 빠져 자신의 시선도 느끼지 못하는 그를 보며 며칠 전 장인이라는 사람과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점심 먹고 오는데 대표실에서 말소리가 나서 문을 살짝 열고 봤다.
얘기를 들어보니 장인인 것 같았다. 이혼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지만, 효준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얘기를 들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하고 있는데 그날 이후로 효준은 일만 했다. 사람 열받게 하지도 않았다.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뭘까? 상관없는 일이지만 궁금했다. 자신을 버리고 그녀에게 갈 땐 평생 잘 먹고 잘살 줄 알았는데 말이다.
잘 살지도 못하고 8년 만에 이혼남이 될 거면서 자신을 그렇게 아프게 했나 싶은 것이 원망스러움이 가슴을 후려쳤다.
그의 시선이 움직이려 하자 그녀는 급히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며칠째 매출 현황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몰라서 성 실장에게 물었지만 그도 모른다고 했다. 물어야 할 사람은 효준뿐이라는 말인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있군.”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그가 뒤에 와 있었다.
“하고 있어요.”
“결과는?”
“그, 그게…….”
“내가 너무 편한 상사인가? 놀고먹어도 월급을 주니 말이야. 마우스 잡아봐.”
“네?”
“어서.”
그녀가 마우스에 손을 올리자 효준이 그 손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뭐 하는 거예요?”
“잘 봐.”
그가 마우스를 움직이며 현황표를 클릭했다.
5년 전의 매출이 어땠는지, 어떤 메뉴가 인기 상품이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손을 겹쳐 마우스를 움직일 필요가 뭐가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 불편했다.
손을 빼려고 하니 그가 더욱 꼭 손을 잡았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의 향기도 고급지면서 향긋했다. 기억하고 있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그의 체취였다. 다른 여자 품에 안겼던 그인데 체취도 여전했다.
“좀 떨어지세요. 불편해요.”
“딴생각하니까 불편하지.”
“딴생각이라니요? 이 손 좀 치워요.”
“난 당당하게 만지는 거야.”
“뭐라고요?”
“만지고 싶다고 말했잖아.”
“떨어지라고요.”
희수가 그의 손을 쳐내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능청스럽고 야비한 자식이었다. 농락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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