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위 포식자 - 3.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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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례식
거울 앞에 선 영주가 제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이런 옷은 처음이다.
검은색 상복.
그리고 머리에는 흰색의 작은 리본 장식이 달린 핀을 꽂았다.
우스운 것은, 재벌이든 아니든 장례식장에서는 모두가 같은 옷을 입게 된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경제를 손에 쥐고 흔들던 설태윤 회장의 장례식이라고 해서 별다른 것은 없다.
유족들은 전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고 여자들은 머리에 흰 핀을 꽂았다.
그리고 한결같이 얼굴에 슬픈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문상객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죽은 설 회장의 유족들은 마네킹처럼 서서 그들을 응대하고 있다.
장시간에 걸친 문상객 맞이에 지치고 짜증 난 표정을 잘도 감추고 있는 그들이 영주는 그저 신기했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서 나한테도 이런 복이 오는 거지.]
설태연 회장이 죽었다.
영주가 그 집에서 제 발로 나온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인은 심장마비.
나이가 이미 일흔을 지나 여든에 가까웠으니 심장마비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설 회장의 죽음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엄마는 오히려 기뻐서 춤을 췄었다.
제 발로 그 집을 걸어 나왔을 때 영주는 다 포기했었다.
엄마에게도 그렇게 설득했었다.
[엄마, 어차피 그 재산, 우리에게는 개미 눈알만큼도 안 떨어져. 무슨 짓을 해도 우리 앞으로 떨어지는 재산은 한 푼도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그냥 다 포기해.]
하루 만에 제 발로 나왔냐며 엄마는 제게 쌍욕을 퍼부었었고 그 온갖 쌍욕을 들으면서도 영주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완벽하게 개가 될 수 없다면, 어중간한 자존심을 놓지 못한다면 결국 손에 쥐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엄마의 갤러리는 소중한 공간이었지만 놓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취직할 수도 있다.
얼마 되지 않지만, 경력도 있고 학력도 있다.
앞으로 제가 살아가야 하고 있어야 할 공간을 만드는 것은 이제 스스로 만들어 보겠다는 결심도 했었다.
그런데 설 회장이 죽었다.
그리고 변호사가 연락해 왔다.
[일단은 유족이니 장례식에 참석해 주셔야 합니다.]
유족.
낯선 단어였고, 생각하지 못했던 단어였다.
그 집을 나온 후에 당연히 호적 정정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주는 여전히 설 회장의 호적에 남아 있었고 법적으로 그의 딸이었다.
그래서 유족이 되었고 우습지만 피도 섞이지 않은 이들 사이에 섞여 누군지 잘 모르고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눠 본 적 없는 [아버지]의 장례를 지금 치르는 중이다.
물론 설 회장의 정부였던 엄마는 이곳에 그저 [문상객]의 자객으로 다녀갔을 뿐이다.
“피곤하지 않아?”
뒤돌아본 영주에게 커피를 건넨 것은 설주원이었다.
“괜찮아요.”
“이런 거 처음이지?”
“네.”
재벌의 장례식. 늘 매스컴으로만 접했던 그 공간에 지금 자신이 서 있다.
“감상이 어때?”
“어떤 감상이요?”
설주원이 제게 왜 이렇게 친절하게 구는지, 다른 말로는 왜 이렇게 제게 치근덕거리는지 영주는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자신이 무슨 유산 상속의 중요한 키를 쥔 사람도 아니고, 설주원에게 필요한 사람도 아닌데 제게 왜 이러는 걸까.
“가족의 일원이 된 감상. 한번 놓쳤던 황금 열쇠를 다시 손에 쥔 감상, 그런 거?”
“황금 열쇠요?”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말도 우습고 황금 열쇠를 손에 쥐었다는 말도 웃기다.
고작 호적에 올랐고 장례식에 참석한 걸로 그 정도까지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래봤자 설이현이 있는 한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아버지 유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빌어먹을 상속세를 떼고 나서도 말이야.”
“알아봤자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 말은 가질 수 있다면 가지고 싶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당연한 거잖아요.”
물욕이 없는 성녀가 아니다.
가질 수 있다면 당연히 가지고 싶은 거 아닌가?
다만 그걸 가지기 위해서 설이현 앞에서 개처럼 굴기 싫었을 뿐이다.
정확하게는, 설이현에게 개처럼 굴어서 얻어 낼 수 있는 거라면 개처럼 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처럼 굴어도 얻어 낼 수 없다는 걸 알아서 물러났을 뿐이다.
잃을 걸 다 잃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게임을 누가 한단 말인가.
“나와 손잡으면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많아질 거라는 건 장담할 수 있어.”
“그게…….”
손을 잡는다고?
“무슨 뜻인가요?”
지금 이 남자는 설이현에게서 그가 주지 않는 것을 빼앗아 내려는 걸까.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도무지 포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욕심이 독한 걸까.
“공개된 아버지 유언장은 가짜야.”
“네?”
“그건 가짜야. 아버지는 죽기 전에 내게도 상속을 남겨주신다고 내용을 바꾸셨어. 그런데 아버지가 죽은 직후에 이현이 그놈이 변호사와 함께 유언장을 바꾼 거야.”
“지금 농담하세요?”
이 남자는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믿는 걸까.
그냥 좀 사는 부자의 유언장이 아니다.
설태연 회장의 유언장이다.
법무법인을 통해서 유언장이 작성되고 공증되었을 거고, 내용 한 줄 변경하기도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게 된다.
영주도 그 정도는 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유언장의 내용을 바꿨다고?
가능할 것 같은가.
그리고 설이현이 그랬다는 것도 믿을 수 없고 설태연이 자기 사생아들을 그렇게까지 신경 써 줬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증거는 가지고 하는 말씀이세요?”
“증거? 그런 게 필요해?”
설주원은 미친 걸까?
자신이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머리가 돌기라도 한 걸까.
“그런 건 상관없어. 그래, 유언장이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중요한 건 내 것을 이현이 손에 쥐고 내놓지 않는다는 거지.”
“그래서요?”
그렇다고 치자.
물론 말에 신빙성은 없지만 그건 둘째치고, 이 남자는 그가 받지 못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 [유산]을 어떻게 받아 낼 생각인 걸까.
“설 회장님께서 유언장을 바꿨다 치고, 어떻게 그걸 받아 내시려고요? 유언장 이야기를 언론에 터트릴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그 앞에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하시려고요?”
지금까지 유산 때문에 진흙탕 수준의 형제 싸움을 벌이는 재벌가들을 매스컴에서 몇몇 봐 왔었다.
그건 정말 진흙탕이었다.
하지만 그런 꼴사나운 싸움을 벌여도 결과가 크게 바뀐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같은 친자식들 간의 싸움에서도 그랬었다.
그런데 이건 하물며 한 어머니를 둔 친자식 간의 싸움도 아니고, 정식 결혼 생활로 태어난 아들 한 명과 호적에는 이름도 올리지 못한 여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과의 싸움이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싸움을 이 남자가 굳이 하겠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그걸 왜 제게 말하는 걸까.
손을 잡자는 말의 의도는 뭘까.
“이현이는 약점 잡힐 짓은 하지 않지. 나는 그놈이 열 살 때부터 그놈을 봐왔었어. 나보다 그놈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걸? 아버지도 그놈에 대해서 나보다는 몰랐을 거야.”
“그래서요?”
“그놈이 관심 있는 걸로 약점을 잡을 거야.”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
“그게 너니까.”
“네?”
장례식은 닷새 동안 치러진다.
오늘이 나흘째가 되는 날이다.
장례식이 너무 길어져서, 문상객들이 예상보다 많아서 이 남자도 지쳐서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된 걸까?
“나는 하루 만에 쫓겨났어요. 관심이 넘쳐서 그런가 보네요.”
차라리 설태연 회장이 제 친아버지였다는 말이라면 더 설득력이 있을 뻔했다.
피도 안 섞인 딸이 아니라 실은 친부가 설태연 회장이었다, 이런 말이었다면 아, 그랬었군요, 아, 충격이네요, 하면서 놀라워하며 받아들였겠지만 지금 이 말은 도무지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설이현이 제게 관심이 있다고? 미쳤나?
관심이 많아서 그 집에 들어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자신을 쫓아냈다는 건가?
유치원생도 아니고, 관심이 많아서 관심 가는 여자애의 고무줄을 끊어 버렸다고?
“잠 좀 자는 것이 낫겠네요. 회장님 죽음에 슬퍼서 잠을 자지 못한 건 아닐 테고 아마 문상객들에게 눈도장을 찍느라 못 잤겠지만요.”
“지금까지 그 집에 몇 명이나 들어왔을 것 같아?”
“네?”
“그 집에, 너나 나 같은 정부의 자식들이 몇 명이나 들어왔을 것 같아? 스무 명? 서른 명? 더 많았어.
그중에서 제 발로 나간 놈, 쫓겨난 놈, 그리고 버틴 놈이 있지.
버틴 놈은 너도 아는 얼굴들이고.
이 장례식장에 너처럼 상복을 입고 있는 놈들 말이야.
그런데 제 발로 나간 놈이나 쫓겨난 놈 중에서 이현이가 쫓아낸 놈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아?”
“스무 명이요?”
설주원이 웃었다.
“한 명이야.”
한 명?
“너.”
영주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한 명이라고? 설마 나만 쫓아낸 거야? 그런 식으로? 그 인간이?’
이건 정말 기가 차는 소리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내버려 두고 자신만 그런 식으로 내쫓았다고?
자신이 무슨 잘못 그렇게 했다고.
언제 자신을 봤다고 그런 식으로 내쫓은 걸까.
“관심 있다는 뜻이야. 네게.”
문득 그 집에서 설이현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설이현을 갤러리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그저 엄마를 스폰하는 사람의 아들, 딱 그 정도의 관심밖에는 없었고 관심을 가질 마음도 없었다.
엮여서 좋을 것이 없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집에 들어가서 제대로 본 설이현은 포식자였었다.
그래서 더 겁먹고 도망쳐 나왔었다.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지금 설주원의 말을 듣는 순간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다.
포식자는 발아래의 벌레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인데, 설이현은 그날 자신에게 왜 그랬을까.
개미 한 마리가 사자의 길을 가로막는다고 사자가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날, 설이현은 제게 이빨을 드러냈었다.
마치 자신이 신경 쓰이기라도 한 것처럼.
개미를 신경 쓰는 포식자라니. 지금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
“그 갤러리.”
주원의 눈매가 영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외모로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주원의 눈매는 도무지 신뢰를 주지 않는다.
이현의 눈매가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눈매라면 주원은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곧 없애 버릴 거라던데?”
“그렇겠지요.”
“나와 손잡으면 그 갤러리는 네게 줄게. 물론 거기 있는 그림들은 전부 옮기고, 진짜 갤러리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거야.”
그럼 그렇지.
거기 있는 작품들의 가치가 얼마인데 그걸 넘길까.
“비자금 빼돌리기 말고, 네가 큐레이터라면 진짜 작품으로 한번 채워 봐.”
설주원은 약았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이 남자는 다 알고 이런 제안을 건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설이현이 뭘 원하는지도 알고 있는 걸까.
그래서 제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거라면, 설마 말도 안 되지만 설이현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 정말이라고?
“네가 네 발로 나간 그다음 날, 난리가 났었어.”
“난리라니요?”
그 이후에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주는 당연히 모른다.
“한 여사가 노친네를 찾아와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나봐.
노친네가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는데 자기 죽기 전까지 그걸 못 참아서 널 내보냈냐고 이현이에게 한 소리 하고, 이현이는 어차피 노친네 곧 죽을 텐데 뭐 하러 그때까지 기다리냐, 노친네 죽으면 내쫓길 거 미리 내쫓은 거라고 맞받아치고. 볼 만했었지.”
“그래서요?”
“이현이가 당장 너 호적에서 지우라고 하는 걸 노친네가 무시했지. 그래서 네가 이 장례식에 오게 된 거야. 유족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자신이 그 집을 나온 후에도 호적이 유지되었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었다.
그런데 설이현은 설 회장과 그렇게 반목할 정도로 자신을 내쫓고 싶어 했는데, 관심이 있었다는 건 또 뭘까.
“그래서 내가 뭘 해 주기를 바라는데요?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다시 집에 들어와.”
“반나절 만에 다시 쫓겨날 거예요.”
그 집에 다시 들어가라고?
이번에는 또 무슨 꼴을 당하고 쫓겨나라고.
“그리고 그때는 회장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신 거지만 지금은 무슨 명목으로 그 집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그냥 들어갔다가 무단 침입으로 경찰이라도 부르면? 물론 그런 구설에 오를 일은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법적으로 넌 아직 그 노친네가 호적에 올린 딸이고, 아직까지 그 집에 대한 재산 상속은 이뤄지지 않은 상태야.
물론 조만간에 상속 완료가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너도, 나도 그 집에 살 자격이 있어. 누구도 널 내쫓을 수도 없고 말이야.”
설주원의 말에서 그의 위기감을 영주도 느꼈다.
상속 완료가 되면 설주원도 그 집에서 나와야 할 거다.
그리고 동시에 설주원은 그가 사장으로 있는 SC건설 사장의 자리도 내놓아야 할 것이 분명하다.
상속 완료.
그것이 마무리되는 순간 설주원은 모든 것을 잃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쥐도 사자를 문다.
지금 설주원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생쥐이고 설이현은 거대한 맹수다.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은 아직까지는 그렇게 막다른 골목은 아니다.
살고 있는 빌라에서 나와야 하고, 갤러리의 소유권을 넘겨줘야 한다고 해도, 그뿐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네요.”
다른 살길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까 굳이 위험한 길에 발을 들여놓을 이유는 없다.
설주원은 충분히 지금 위태로운 상태고, 그와 한 배를 타면 자신도 그가 가라앉을 때 가라앉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니까, 이 제안은 거절하는 것이 맞다.
“죄송하네요.”
딱 잘라 거절한 영주가 그의 손에 들린 종이컵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그 자리를 떴다.
엮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으니까 말이다.
***
[나와 손잡으면 그 갤러리는 네게 줄게. 물론 거기 있는 그림들은 전부 옮기고, 진짜 갤러리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거야.]
‘정신 차려, 한영주. 그런 게 바로 독이 든 사과라는 거야.’
영주가 찬 물에 얼굴을 씻은 다음 거울을 쳐다봤다.
피도 안 섞인 설 회장의 장례식장에서 지금 며칠째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빈소를 지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다.
이렇게 해 봤자 자신에게 돌아올 게 뭐라고 지금 이 정성을 떨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이 장례식장에 오고 싶지 않았다.
벌써 몇 장의 사진을 찍혔다.
[설 회장의 혼외자식들], [배다른 형제의 난] 이런 류의 제목들이 실린 기사에 자신의 얼굴이 오르내린다고 생각하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갤러리는 탐이 나지만 거기에 눈이 멀어서 스스로를 망치는 길 안으로 걸어 들어갈 정도로 물욕에 눈이 멀지는 않았다.
이 장례식에 혼외자식 아닌 혼외자식으로 참석한 것도 전부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다.
어차피 엄마가 원하는 것을 전부 들어주지는 못한다.
들어주고 싶다고 해서 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봤다]는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엄마는 사생활이 떳떳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제게는 [좋은 엄마]였었다.
친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를 지우지도 않고 낳아 주었고, 낳은 다음에도 역시 버리지 않고 키워 주었다.
아빠 없이 자란 애라서 그렇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해 준 엄마였다.
그건 알고 있다.
그래서 엄마가 제발 그 집에 들어가 달라고 부탁했을 때 망설이면서도 들어갔었고, 장례식에 다녀오라고 부탁을 했을 때도 거절할 수 없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고, 이 장례식을 끝으로 더는 엄마가 제게 부탁할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겼다.
‘엄마가 알면 분명 설주원과 손을 잡으라고 하시겠지.’
그 집에서 그냥 나왔을 때 엄마는 심한 욕을 온종일 쏟아 냈었다.
아마 이번 일을 알게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부터 구하면 돼.’
모아 놓은 돈은 있다.
살고 있는 빌라에서 쫓겨나듯 나와야 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오갈 곳 없는 빈털터리가 되는 건 아니다.
설 회장의 비자금을 관리하며 엄마도 뒷돈을 꽤 챙겼고, 큐레이터 일을 하면서 영주도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크지 않은 집을 전세로 얻어도 되고 아니면 대출을 끼고 매입해도 된다.
모아 놓은 돈을 생활비로 쓰며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도 늦지는 않는다.
급한 것은 없다.
다만 엄마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익숙한 풍경에서 튕겨져 나가는 것이 싫은 것뿐이라는 걸 영주도 안다.
화려한 삶. 그게 엄마의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타인의 것으로 꾸며진 화려함은 잠이 깨면 사라지는 꿈처럼 허상일 뿐이다.
모래 위에 쌓은 성에 불과하다.
“피곤해…….”
다크서클이 낀 눈가를 손으로 만지던 영주가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짝 넘긴 후에 화장실에서 나왔다.
유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수면실 안쪽에 붙어 있는 화장실의 문을 열고 나온 영주가 그 자리에 멈춰 선 것은 여기까지 쫓아온 설주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난 할 말 다 끝났어요.”
왜 이렇게 끈질긴 걸까.
“갤러리 말고 더 챙겨 줄게.”
“관심 없어요.”
“정말 관심 없어? 관심 없으면 여긴 왜 왔어?”
‘엄마 때문에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동안 회장님 덕분에 대학도 다녔고 돈도 모았으니까요. 그 정도 은혜는 알고 있어요.”
“한 여사님도 그렇게 생각할까?”
설주원의 입에서 엄마의 이름이 나오자 영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한 여사님은 네 생각과 다르게 생각할걸?”
“우리 엄마 괜히 들쑤시지 말아요.”
“한 여사님 욕심을 내가 좀 알지.”
“엄마가 뭐라고 하던 나는 안 할 거예요. 괜한 사람 끌어들이지 마세요.”
“설영주.”
설주원이 다가오자 영주가 긴장했다.
“한영주예요.”
설영주라니, 자신은 설씨가 아니다.
“비켜 주…….”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설주원을 밀치려던 영주의 손을 설주원이 거칠게 붙잡았다.
“놔주세요.”
소리 지르면 밖에까지 다 들린다.
그래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영주가 제 손목을 잡은 설주원을 노려봤다.
“놔요.”
“확답을 주고 가.”
“놓으라구요.”
붙잡힌 손목이 아프다.
“내가 좋은 말로 할 때 한다고 해. 험한 꼴 당하고 한다고 하지 말고.”
“미친 거 아냐?”
영주가 반대편 손으로 주원의 뺨을 올려붙였다.
쫘악-!
주원의 뺨에 붉은 손자국이 나는 것과 동시에 주원이 영주를 구석으로 떠밀었다.
“꺄악!”
구석에 처박힌 영주가 다시 저를 향해 손을 올리는 남자를 보며 비명을 지를 때였다.
“입들 좀 닥치지 그래?”
수면실의 문이 조금 열리며 그 사이로 반쯤 모습을 비친 설이현이 경멸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영주와 주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밖에 기자들 와 있는데 아주 라이브 쇼를 하지 그래?”
아마 밖에까지 비명이 들렸던 것이리라.
제게 머무는 설이현의 차가운 경멸의 눈빛에 영주가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고 그때까지 손을 올린 채로 서 있는 주원을 한번 흘긴 후에 문까지 걸어온 영주가 문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비켜 줘야 나갈 거 아니에요?”
“그러고 나오려고?”
이현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와 제 가슴에 머물자 영주가 덩달아 고개를 내렸다.
‘이게 뭐야!’
조금 전에 구석으로 떠밀리며 풀어진 걸까.
상복의 앞섶이 흐트러지며 벌어진 채였다.
그리고 벌어진 앞섶으로 브래지어의 레이스가 엿보였다. 불룩한 젖무덤도 함께 말이다.
“별 거지 같은 게 지랄을 떨어요.”
잘생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험한 말을 쏟아 내는 남자를 쏘아본 영주가 앞섶을 여미고 문을 떠밀었다.
그리고 남자를 어깨로 치며 수면실을 나갔다.
나흘 동안 잘 버텼는데 이제 하루 남기고 이런 꼴을 당할 줄은 몰랐다.
설이현도, 설주원도 다 개 같다.
전부 다 미친놈들이고, 개 같은 놈들이다.
저런 인간들과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다.
장례식을 끝으로 두 번 다시는 저런 인간들을 마주치지 말자 생각하며 영주가 문상객들 사이로 들어갔다.
“적당히 해.”
수면실 안에 남아 있는 주원을 향해 이현이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너는 형한테 존댓말을 쓸 줄도 모르는 거냐?”
“형이 어디 있는데?”
“설이현.”
“나한테서 형 대접 받으려는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었다는 게 대단하네. 멍청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거야?”
거기까지 말한 이현이 문을 닫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나와도 좋다고 할 때까지 거기서 나올 생각하지 마. 앞에서 자꾸 파리처럼 앵앵거리는 거 신경 쓰이니까.”
그리고 문이 닫혔다.
“……!”
주먹을 꽉 쥔 설주원의 목에 핏대가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저 잘난 얼굴에 주먹을 날려 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모든 것이 다 끝장이다.
“지금은 웃음이 나오지? 언제까지 웃나 보자.”
아직 기회가 있다.
저 잘난 설이현에게서 자신의 몫을 되찾아올 기회.
자신도 엄연히 설 회장의 아들이다.
그 피가 몸에 흐르고 있다.
그런데 혼자만 자식인 척 구는 설이현은 제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작정이다.
물론 그렇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제 몫은 찾아올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영주가 필요하다. 한영주가 아니라 설영주가.
***
“회장님.”
차가운 커피가 담긴 플라스틱 컵을 받아 들던 이현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벽에 기대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영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모르는 사람투성이에 예민한 성격이라 아마 나흘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요령이라도 있으면 수면실에서 적당히 잠을 잘 텐데 저 여자는 요령이라는 것도 모른다.
애당초 이 장례식장에 영주가 올 줄은 몰랐다.
[처리했다.]
빌어먹을 아버지가 호적에서 영주의 이름을 지웠다고 말했을 때 정말 그런 줄 알고 믿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이현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믿어 본 적이 없다.
아버지라는 인간은 남의 뒤통수는 물론 자식의 뒤통수도 아무렇지 않게 치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룹 총수가 아니었다면 분명 사기꾼이 되었을 거다.
아버지는 누구도 믿지 않았고, 동시에 누구와 약속을 하던 그 약속을 본인의 이득에 따라 마음대로 어기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이현은 아버지를 믿은 적이 없다.
부모자식 간이지만 굳이 믿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이라서 긴장이 풀렸는지 경계심이 옅어졌는지 호적에서 영주를 지웠다는 그 말은 덜컥 믿어 버리고 말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영주는 여전히 호적에 남아 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호적에서 파양이 쉬웠지만 아버지가 죽은 지금은 그마저도 어렵다.
영주는 혼외자가 아닌 양자 입양이라는 형식으로 아버지의 호적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호적에서 다시 그녀의 이름을 빼려면 협의 파양이라는 형식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협의 파양의 당사자인 영주와 아버지 중에서 이미 아버지는 죽었다.
자식인 자신이 영주를 호적에서 협의 파양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굳이 하려면 입양 무효 소송을 걸어야 한다.
어려운 방법은 아니지만 그런 방법까지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 똥을 싸지르고 죽고 지랄이야.’
아버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제게 항상 이런 식의 똥을 던졌다.
혼외자식들을 보란 듯이 집 안에 들인 것도 자신을 놀려 먹을 생각이었다는 걸 이현은 안다.
부자간의 애틋한 관계? 그런 것은 애당초 없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자신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아니라 경쟁자 비슷한 것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이현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를 경멸하고 미워했었다.
아버지가 선물한 것들은 그게 뭐라도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을 어려서부터 종종 봐왔었다.
[네 아비가 나한테 준 것 중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건 바로 너란다.]
자장가처럼 들었던 말이다.
아버지는 미워했지만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인 자신만큼은 애틋하게 생각했던 어머니와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원했지만 단 한 번도 그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던 아버지.
[사랑? 웃기고 있네. 3살 된 아들이 있는 주제에 사랑?]
아버지에게 혼외자식이 있다는 걸 어머니가 알게 된 것은 결혼 후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이었다.
결혼은 무를 수 없었고 어머니는 그때부터 아버지를 경멸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마도 어머니의 높은 자존심은 남편을 고작 가정부 따위와 나눠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질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버지는 매일 밤 다른 여자를 만났고, 다른 여자의 향수 냄새를 묻히고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의 앞에서 그게 전부 어머니의 탓이라고 화내고 변명하는 것을 반복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재산은 전부 이현이가 물려받게 해요. 다른 여자 자식들에게는 집 한 채도 주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여자들을 질투한 적은 없지만 그녀의 소중한 아들의 앞길을 위협하는 일체의 존재도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살하기 직전, 아버지에게 그렇게 확답을 받아 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어머니가 자살할 줄 몰랐던 아버지는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받아 낸 어머니는 다음 날 자살했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던 아버지는 그 약속만큼은 지켰다.
다른 혼외자들에게는 주식 한 주도 넘겨주지 않았고, 집 한 채도 물려주지 않았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서라는 것을 이현은 안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세상에는 돈과 권력이 있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웠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일찌감치 배웠다.
그런 것들이 생각지도 못한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어려서 이미, 깨달았다.
그래서 이현은 영주가 눈에 들어와도 그녀를 욕심내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녀가 눈에 밟혔어도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관계를 끊어 버리고, 제 영역 안에 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망할 노인네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쳤다.
“졸고 지랄이야.”
이현이 마시려던 커피를 다시 비서에게 되돌려줬다.
“회장님?”
“뜨거운 커피로 바꿔 와.”
괜한 변덕을 부려 본다.
“알겠습니다.”
“그건.”
아이스커피를 가지고 돌아서려던 비서에게 이현이 괜히 한마디 던졌다.
“아무나 줘 버려.”
이렇게만 암시를 줘도 비서는 알아서 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 자신이 영주를 쳐다보던 것을 비서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나]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둔하다면 비서를 갈아치워야 한다.
그리고 잠시 후 벽에 기대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영주의 곁으로 다가간 비서가 그녀에게 웃으면서 아이스커피를 건네는 것을 이현이 보는 듯 마는 듯 곁눈질로 훔쳐봤다.
‘웃기는.’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커피를 받아 들었고 이내 그걸 한 모금 마셨다.
아이스커피를 양손으로 쥐고 따로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제 발치만 쳐다보며 홀짝거리는 영주의 모습은 이 장례식장에서 혼자 겉돌고 있다.
겉도는 것이 낫다.
설주원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모르지만, 영주는 계속 저렇게 이곳에 익숙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을 거다.
영주를 어머니처럼 만들지도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현의 시선은 계속 영주를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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