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2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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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계약 #2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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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계약 #2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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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본 서정혁의 얼굴과 그의 말로 따져 보면 적어도 그 소문들은 전부 가짜다. 물론 성병을 가지고 있거나 지독한 섹스 중독자라는 가능성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는 괴물도 아니었고 설사 그가 섹스 중독자라 하더라도 그걸 참아 내 줄 여자가 없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럼 그 소문들은 뭐지?






“한희민 씨.”






생각에 잠겨 있던 희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메이드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그녀가 들어왔던 입구에 서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네.”






일어선 희민은 메이드를 따라나섰다. 공간과 공간이 이어진 곳을 몇 군데쯤 지나자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장소가 나왔다. 


기다란 직사각형의 마호가니 식탁을 본 희민은 의문이 들었다.






‘그 남자의 식구들도 여기 사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나치게 커다란 식탁이었다. 열 명도 넘게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거기에 1인분의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수준급의 솜씨로 조리된 스테이크와 샐러드, 달팽이 요리가 있었지만 역시 식욕은 일지 않았다.






‘무의미한 도피를 굳이.’






희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차피 닥칠 일이고 그 일을 하기 위해 여기 온 거였다. 시간을 벌어 봐야 뭘 한다는 건지…….






포크로 깨작거리던 희민은 결국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황금색 샴페인만 한 잔 비워 냈다. 


희민이 일어서자 이곳으로 그녀를 데려온 메이드가 다가왔다.






“안내하겠습니다.”






그 남자의 방으로 데려가는 건가?






“잠시만요.”






희민의 말에 앞서 걷던 메이드가 멈춰 섰다. 


얼굴에 특이한 구석이라곤 없지만 피부가 창백해 보이고, 다른 메이드들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용건을 묻는 듯 시선을 마주쳐 오는 메이드에게 희민이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욕실을 먼저 쓰고 싶은데요.”






희민의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메이드가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회장님 방 안에 욕실이 있습니다. 혹시 다른 곳의 욕실을 사용하고 싶으신 건가요?”


“가능하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메이드가 방향을 틀었다. 다른 쪽 복도로 잠시 걸어간 그녀가 견고한 문을 열어 줬다.






꽤 넓은 방이었는데 금가루가 뿌려진 듯한 실크 벽지와 깨끗한 화이트 톤의 침구와 가구로 은은한 분위기를 냈다. 


이 저택의 전체 인테리어와는 다르게 상당히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공간이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곳인 것 같기도 했다.






‘여긴 손님방인가? 누군가 쓰는……?’






희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생각을 간파한 듯 메이드가 말했다.






“여긴 한희민 씨가 사용할 방입니다.”






희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그래서 이곳으로 안내해 준 건가요?”


“네. 이 안에 욕실이 있습니다. 여기 대기하고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네.”






대답한 희민이 욕실로 들어갔다. 바로 욕실이 있지 않고 파우더룸을 거친 뒤 욕실이 연결되는 구조였다. 


파우더룸엔 조명이 달린 화장대와 푹신한 소파 등이 갖춰져 있었다. 신경 써서 만들어 둔 듯한 공간을 희민이 잠시 바라봤다.






그 남자는 신부를 구한 게 아니야.






그런데도 그저 자신의 아이를 낳을 여자의 방을 마치 신부의 방처럼 만들어 놓은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쩌면 내가 오기 전에 다른 사람이 썼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까 서정혁은 당신밖에 없다고 했잖아. 아, 모르겠어.’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고개를 저은 희민이 빠르게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안에도 모든 것이 새 제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누군가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새 샤워 용품들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메이드는 아까와 같은 곳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희민은 덜 마른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조용히 메이드를 따랐다. 쿵, 쿵, 쿵. 복도를 걸어갈수록 심장 뛰는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샤워를 괜히 했나?’






아까 그를 만났을 때 긴장으로 땀에 젖은 몸이 신경이 쓰여서 한 건데 너무 준비를 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아 불편했다.


그때 복도 가장 끝 문 앞에서 메이드가 멈춰 섰다.






“이곳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메이드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






희민은 잠시 견고한 문을 바라봤다. 여기가 서정혁의 방. 아까 봤던, 사람을 긴장시키는 남자가 이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밀려들어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메이드의 시선이 느껴지자 희민은 숨을 들이켜고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달칵―






희민은 방금 전까지 긴장으로 어지러울 정도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초연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녀에게 긴장을 감추는 일, 태도를 바꾸는 일은 익숙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온 만큼 두려움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는 일도 익숙했다. 지금처럼.






“꽤 오래 걸렸군요.”






정혁은 광활하리만치 넓은 공간 안에서 기다란 소파에 앉아 버번을 마시고 있었다. 


썰렁할 정도로 넓기만 한 공간에 별다른 가구도 없이 혼자 앉아 있는데도 정혁은 모든 공간을 차지한 사람처럼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다리게 했네요. 잠시 씻고 오느라.”






정혁의 독특한 존재감에 희민은 덜 마른 피부에 소름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심한 얼굴로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정혁은 위스키 잔이 아닌 와인 잔처럼 둥근 잔을 들고 있었다. 독한 버번을 거의 희석시키지도 않고 마시고 있으면서도 그의 얼굴은 전혀 빈틈이 없었다.






‘……여전히 속을 알 수가 없어.’






희민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서정혁을 파악해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는 가면 같은 얼굴이었다.






“습관 같군요.”


“네?”






시선을 마주한 채 느른히 하는 말에 희민이 되물었다. 정혁은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상체를 숙여 제 무릎 위에서 가볍게 손깍지를 꼈다.






“상대방을 파악해야 마음이 편합니까?”






또 들켰어.






희민이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적어도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요.”






태연한 척 대답하면서도 입 안의 침이 바짝 말랐다.






‘술을 마시고 있는 건 저 남자인데 왜 내가 목이 타?’






희민의 눈썹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상체를 숙인 정혁과 시선이 가까워져서 자신이 조금 전보다 더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심장의 울림이 점점 더 커져서 저 남자에게 들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침을 삼켰다.






꿀꺽.






‘이런.’






조용한 공간을 울리는 침 삼키는 소리에 희민은 지그시 입술 안을 짓씹었다. 


이 남자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도, 그저 맞은편에 앉아 바라보고만 있는데도 자신의 페이스가 망가지고 있었다.






“한잔하겠습니까?”


“주세요.”






정혁이 묻는 말에 희민은 곧장 대답했다.






식사 때 마신 약한 도수의 샴페인 한 잔으로 지금의 이 긴장을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술이 센 남자들에게 회식에서도 지지 않으려고 억지로 키워 놓은 주량이 이럴 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같이 마실 생각은 없던 모양인지 몸을 일으켜 바에서 잔을 하나 더 가져왔다. 


달그락, 정혁이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는 모습에 희민이 시선을 박았다.






‘차라리 확 취해 버리면……. 아니, 아니야.’






희민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도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무리 이런 상황에 내몰렸더라도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저 조금 긴장을 누그러뜨려 주는 정도로만 마시고 싶었다.






‘아무리 엉망이더라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하니까.’






그게 무엇이든 간에.






탁.






정혁이 희민 앞에 얼음에 잔뜩 희석시킨 버번 잔을 내려놨다. 희민은 그 잔을 바짝 마른 입술로 가져갔다. 


시선은 잔을 향해 있었지만, 남자의 눈빛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게 느껴졌다.






……꿀꺽.






크게 한 모금 삼킨 희민이 잔을 내려놨다.






“나쁘지 않네요.”






희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정혁이 물었다.






“술 말입니까?”


“네. 꽤 맛있는데요.”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걸 여과 없이 들켰으면서도 희민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그 신비로운 빛깔의 눈동자가 희민을 관찰하듯 바라봤다.






“서정혁 씨도 날 파악하는 중인가요?”


“아닙니다.”






정혁이 시선을 휘어 감으며 가벼이 웃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한희민 씨를 파악할 생각은 없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할 생각입니다.”






그의 말이 육체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 희민은 방금 전 식도를 통해 내려간 독한 알코올이 배 속에서 홧홧해지는 것 같았다. 


독한 만큼 버번은 빠르게 온몸에 퍼져 나갔다.






“그만 시작하죠.”






반쯤 비운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희민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침실이 어디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버번을 마시는 동안 저 벽면과 이어진 공간에 침실이 있는 걸 확인했으니까.






“…….”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침실로 걸어가는 희민의 뒷모습을 정혁이 말없이 응시했다. 


표정 변화 없이 보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일순 묘한 빛으로 빛났다.






그가 잔을 든 채 천천히 일어섰다.






희민을 따라 걸어가니 밖보다 낮은 조도의 침실 안에 그녀가 보였다. 희민은 짙은 네이비 컬러의 침대 위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큰 눈을 치켜뜨고 있는 얼굴을 그가 바라봤다.






희민에게 시선을 맞춘 정혁이 들고 있던 잔은 가볍게 돌렸다.






“……재밌군요.”


“뭐가요?”






혼잣말처럼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희민은 조금 예민하게 대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정혁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침실 입구에 기대서 있었지만, 그가 그곳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 그녀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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