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4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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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계약 #4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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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계약 #4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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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회장님 몸엔…….”


“차 실장.”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차 실장이 말을 멈추고 돌아봤다. 희민의 시선도 복도로 향하자 슈트를 입은 정혁이 서 있었다.






‘아직 출발 안 한 건가?’






아까 준비를 마친 모습을 봤기 때문에 바로 출발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저택에 있던 모양이다.






“……회장님.”






차 실장이 정중하게 그의 앞에 섰다.


차 실장에게 향한 정혁의 시선은 아까까지 희민을 향한 시선과 전혀 달랐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감한 얼굴을 보니 희민은 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그만 출발하죠.”






차 실장에게 말하고 희민을 힐긋 쳐다본 정혁이 복도를 걸어갔다. 


앞서 걷는 정혁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본 차 실장이 희민을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이 착잡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자 희민은 이상함을 느꼈다.






“실례지만 손을 잠시 줘 보시겠습니까.”


“손이요?”






갑자기 손을 달라는 말에 안 그래도 이상함을 느끼던 희민이 눈을 깜빡였다.






“네.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러니 잠시만 줘 보세요.”






진지한 차 실장의 얼굴을 본 희민이 망설이다가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여기…….”






차 실장이 희민의 손을 잡고 심각한 얼굴로 바라봤다.






‘왜 그러지?’






희민이 이상하게 보는데 그녀가 곧 손을 놔줬다.






“손톱은 짧게 다듬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손톱?






정혁을 따라 멀어지는 차 실장의 뒷모습을 보던 희민이 제 손톱을 바라봤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손톱을 보고 있으니 머릿속에 스치는 게 있었다.








‘뭐든 말해서 날 멈추게 해. 내 등을 쥐어뜯는 것만으론 어림없으니까.’






혹시 내가 할퀴어 대서?






그러고 보니 어젯밤 정혁의 등을 꽤 많이 할퀸 것 같았다. 그래도 그걸 저렇게 정색을 하고 말하러 올 건 뭐야.






‘그 남자 등을 보기라도 했나?’






그렇게 생각하니 좀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실장이라지만 보통 남자 상사의 등을 보고 그러진 않을 텐데…….






“그만 생각하자.”






고개를 저은 희민이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고민해 봐야 알 수 없는 문제들이 하루 사이에 여러 가지 떠오르자 머릿속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고 있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기 위해선 최대한 드라이하게 생각하는 쪽이 좋을 거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생활을 버티기 힘들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생각을 차단한 희민이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며 들고 있는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응. 희민아.”


“엄마.”






서희의 다정한 목소리에 휴대폰을 귀에 댄 희민의 얼굴에 말간 웃음이 피어났다.






“뭐 하고 있었어?”


“뭐 하고 있긴. 그냥 있어. 너는? 출장이라며.”






일상적인 말투였지만 오랜만에 걸려 온 딸의 전화에 서희의 반가움이 느껴졌다.






“응. 당분간 지방에 박혀 있어야 해.”






희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화장대 서랍 손잡이를 괜히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은 병원에 갈 수가 없어 대충 장기 출장이라고 둘러댄 상태였다.






“전에도 내내 해외 출장이더니……. 많이 바쁜가 보네. 우리 딸 찾는 데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일도 몸 생각해서 적당히 해야지. 그러다 병난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건강 잘 챙기고 있으니까. 그보다 엄마는 괜찮은 거지? 별일 없고?”




“나야 병실도 너무 좋아지고 호강하고 있지. 아픈 사람이 이렇게 호사스럽게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왜 병실 옮겼냐고 자꾸 물어봐서 출세한 딸 덕분이라고 하면 다들 부럽게 쳐다봐.”






서랍장 손잡이를 만지는 희민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뭐 하러 그런 말을 해.”


“내 딸이 자랑스러우니까 그러지.”






희민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는 걸 인지하지 못한 듯 서희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희민이 들리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론 그런 말 하지 마. 병원 갈 때마다 신경 쓰이잖아.”


“별걸 다 신경 쓴다. 그럴 거 없어. 근데 너 아직 만나는 남자 없는 거야?”






익숙한 질문이 나오자 희민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급히 말했다.






“아, 엄마 회의 시간 다 됐어. 이만 끊을게.”


“그래? 밥 잘 챙겨 먹고. 너무 무리하지 마. 알았지?”


“다음에 또 전화할게.”






황망히 전화를 끊은 희민이 화장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쳐다봤다.






“…….”






거짓말뿐인 대화.


진실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방금 전의 통화 내용을 떠올리니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말들이 전부 사실이던 때가 있었다.








‘엄마! 나 또 승진했어!’


‘세상에, 벌써 대리? 다들 세양 정도 대기업이면 금수저 아니고선 승진이 오래 걸린다던데.’




‘그러니까 엄마 딸이 대단한 거지. 마음껏 자랑하고 다녀.’


‘아하하. 알았어. 우리 딸 잘난 거 여기저기 다 자랑하고 다닐게.’






매번 신이 나서 자랑한 이유는 그렇게 자랑할 때마다 병원에 있는 서희 목소리가 한층 밝아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희민 자신도 그랬다. 서희가 저를 자랑스러워하는 게 느껴질 때마다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곤 했다.


물론 서희가 가장 기쁜 일은 따로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 모든 게 다 사라져 버렸다.






서희가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하던 딸은 사내 기밀 유출범이 되어 교도소에 갔고, 그 교도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자식을 낳아야 하는 계약서를 썼다.


이런 저를 만약 엄마가 알게 된다면?






물론 그녀는 자신을 믿어 줄 거였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까. 


하지만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엄마인 그녀를 살리기 위해 이런 선택을 한 자신을 받아들일 순 없을 거였다.


이 일은 서희의 삶에 대한 모든 의지를 끊어 놓는 일이 될 거였다.






‘그러니까…… 들키면 안 돼. 절대로.’






거울 속 희민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서희가 알지 못하도록 모든 일들이 자기 선에서 끝나야 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표정을 바꾼 희민은 휴대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석호 씨.”






희민이 부르자 상대방의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전에 연락 안 되던데. 회사에서 얘기 듣고 깜짝 놀랐어.”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보다…….”


“그럴 일이라니. 그게 보통 일이야? 한두 푼도 아니고 그런 거액을 대체 어떻게 구한 거야? 변호사들은 다 어떻게 한 거고.”






석호가 궁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석호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기고, 유일하게 그녀의 결백을 믿어 주고 면회도 와 줬던 사람이었다.






“희민 씨 그때 봤을 때 정말 걱정 많이 했는데……. 그땐 아무 방법도 없다고 해서 나도 얼마나 암담했는데.”



“걱정해 준 거 알아. 고마워. 그런데 내가 지금 자세한 얘긴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나중에 설명해 줄게. 그래도 되지?”




“혹시 무슨…… 위험한 일 같은 거 한 건 아니지?






염려가 담긴 목소리에 희민이 쓰게 웃었다.






“위험한 일 한다고 해서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어.”


“하긴 그건 그렇지. 어쨌든 내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응. 걱정할 거 없어. 그보다 석호 씨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희민이 휴대폰을 고쳐 잡고 진지한 눈빛을 했다.






“혹시 그 일과 관련해서 회사에서 도는 소문 같은 거 들은 적 없어? 루머든 뭐든.”






이런 일은 보통 소문으로 흘러나오게 되어 있었다. 


가짜 정보든 진짜 정보든 뭐든 회사 내에서 도는 소문들을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소문? 글쎄…….”






조금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에 희민이 다시 물었다.






“뭐든 생각해 봐. 떠다니는 거라도 들은 거 없어?”






“솔직히 내가 들은 건 희민 씨에 대한 거야.”


“나?”






“그래. 뭐 GL그룹 임원이랑 스폰서 겸 불륜인데 그 임원을 위해서 그런 거 하다가 걸린 거라는 둥, 막상 걸리니까 내쳐진 거라는 둥…… 그런 비슷한 소문들이 많이 돌아다니던데?”






……하.






희민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소문은 그녀가 이른 나이에 승진을 거듭할 때부터 수시로 돌던 소문이었다. 


그땐 상대가 경쟁업체인 GL그룹이 아니라 다니고 있던 회사인 세양그룹의 임원이라는 점만 달랐을 뿐이다. 


그 임원에게 몸을 대 주고 승진을 약속받은 거라고. 그래서 저렇게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하는 거라고.






“미안.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들으니까 기분 나쁘지?”


“아니야. 한두 번 들은 말도 아니고.”






희민이 불쾌감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눈치를 보던 석호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그렇게 쿨한 면이 한희민답다.”


“칭찬인가.”






그녀가 피식 웃자 석호도 가볍게 웃었다.






“칭찬 맞아. 그런데 소문 물어보는 거 보면 누가 그랬는지 찾으려는 거야?”


“그래야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잖아. 그런 일을 당했는데.”






희민은 가볍게 말했지만 석호에게는 무겁게 다가왔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한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하긴 나라도 억울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 방법은 있겠어?”


“지금 찾아보는 중이야.”


“솔직히 너 질투하는 사람 많았잖아. 그중에 맘에 걸리는 사람 없어? 혹시 원한 살 일이라든가.”






희민이 답답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누구라고 딱 짚이진 않아.”


“그래……. 우선 천천히 생각해 봐. 내가 도움 줄 수 있는 일이면 도와줄 테니 언제라도 전화하고.”






“고마워. 석호 씨.”


“고맙긴. 그럼 다음에 그 흥미진진한 얘기 꼭 해 주기다?”




“알았어. 또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희민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노트북을 켰다. 개인 PC로 인증된 사내 인트라넷으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차단되어 있었다.






‘역시.’






하긴 회사 내부 기밀 유출범 계정을 지금까지 남겨 놨을 리는 없을 거였다.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길게 한숨을 내쉰 희민이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짚이는 사람이라니…….”






방금 전 석호와의 통화 내용을 떠올린 그녀의 말간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나하나 기억을 뒤져 머릿속에 떠올려 보던 희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불가능해.”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는 동안 결과적으로는 순차적으로 그 자리에 갔었어야 할 사람의 자리를 뺏은 게 된다. 


그런 식으로 따져 보면 승진 가능성이 있던 사람들 전부가 되는데 범위가 너무 넓었다.


게다가 그것만이 아니라 큰 프로젝트에서 밀린 사람이나 자신 때문에 대형 입찰을 놓친 경쟁업체까지 생각해 보면 원한 살 일은 차고도 넘쳤다.


그건 그녀가 다른 사람보다 기억력이 좋다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이 잘난 기억력 하나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가장 필요한 지금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네.”






자조 섞인 목소리를 내뱉은 희민이 가느다란 손목을 올려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아.’






순간 그녀가 멈칫거렸다.


다리 사이에 뭔가 흘러내리는 미끈한 것이 느껴졌다. 팬티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이물감에 희민의 입술이 놀란 듯 벌어졌다.






‘그 남자 게 아직도?’






그의 사정액이 흘러나오는 느낌에 희민은 기분이 묘해지며 얼굴이 붉어졌다. 


야릇한 그 감촉이 오랫동안 쑤셔지며 자극당했던 내부의 감각을 다시 떠오르게 만들었고 동시에 음모 아래가 흠뻑 젖어 들었다.






콘돔 없이 관계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전의 남자들은 희민보다 더 피임에 집착했다. 


혹여나 임신이라도 해서 자기 앞날에 지장이 가는 것을 무척 꺼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안에 사정하면 이렇게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도 정액이 다리 사이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몰랐다. 


미끌거리며 팬티를 축축이 적시는 감촉은 왠지 음란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정액을 깊이 사정하고도 만족되지 않는 듯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그 단단함이, 온갖 감언이설로 그녀와 연애하게 된 이후로도 피임에 집착하던 그 남자들과 비교가 됐다. 


사정하고도 자신을 향한 그의 욕망은 집요하도록 단단했으니까.


물론 그건 한희민을 향한 욕망이 아닌 임신 가능한 한희민 몸에 한정된 욕망이겠지만…….






‘그래도 서정혁은 그의 말대로라면 처음이었잖아.’






붉어진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던 희민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워부터 해야겠어.”






은밀한 피부를 자극하는 그의 욕망 때문에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 같으니까.


희민은 혹시 몰라 노트북 화면을 아래로 내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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