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포효 17
“소진선 씨 괜찮을까?”
희수가 물었다.
“분하다고 부들부들 떨고 있겠지. 뭐든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미쳐버리는 여자니까. 당신한테 분풀이하러 왔다가 오히려 당했으니 잠 못 잘 거야.”
“내가 괘씸하지 않아?”
“당신이 왜?”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일로 그 사람 상처 줬잖아. 이혼했다고 해도 당신 아내였던 사람이잖아.”
희수는 반찬을 냉장고에 넣었다. 그가 뭐라고 할지 몰라 쳐다보지 못했다.
“가장 나쁜 인간은 나야. 어찌 보면 그 사람도 피해자야. 배경 좋은 여자인 줄 알고 사랑도 없이 그 사람 선택했어.
결혼 생활 내내 일만 했어. 그 사람의 불만 이해해. 일만 하고 싶었어. 출세하고 싶었어.
8년 전 그땐 그 사람만이 내 인생의 동아줄인 줄만 알았어. 그런데 조금씩 하는 일이 잘되고 성공의 기쁨을 알게 되면서 더 그 사람을 외롭게 만들었어. 그래서 그 사람이 그렇게 됐을 거야. 나 때문이라는 그 사람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야.”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던 건지 물어봐도 돼?”
설거지를 마친 효준은 희수에게 눈을 돌렸다.
“와인 마시자.”
“응.”
효준은 와인을 땄고, 희수는 과일을 깎았다. 말을 하기 싫은 건지, 잠시 시간을 버는 건지 몰라 희수의 마음은 싸했다.
과일 접시와 와인 잔을 가지고 거실로 나오자 그는 잔에 와인을 따랐다.
와인 몇 잔 마시고 두 사람의 분위기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살짝 알딸딸해진 희수도 기분이 좋았다. 아직 효준에게서는 아무 말 듣지 못했지만, 꼭 들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와인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뱅뱅 돌리는데 효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외롭게 만든다는 이유로 아내는 밖으로 돌기 시작했어. 상류층 모임에 참석하긴 했는데 매일 외출이었어. 집에 들어가도 없었어.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나아서 구속 따윈 하지 않았어. 그러다가 임신인 걸 알았지.”
“당신, 애 있어?”
“아니. 아내는 임신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어. 늘 놀러 다녔고, 술도 마시더라고. 그때 잔소리를 했더니 언제부터 남편이었다고 참견이냐고 화를 내더라고. 홀몸이었다면 상관하지 않았을 거야.”
효준이 말을 끊었다. 하기 힘든 말을 하는 것 같아서 희수는 그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남자가 생겼어. 내 애를 가진 상태에서 다른 놈하고 그 짓을 하고 돌아다녔어. 그러다가 유산이 됐어.”
놀란 희수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혼 이유가 소진선에게 있다는 말을 듣고 뭘까 궁금하기는 했는데 이런 엄청난 이유였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난 남자가 유부남이었어. 그 남자 와이프가 그곳 청음으로 찾아와 한바탕 휘젓고 갔어.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고, 장인어른 귀에 그 사실이 들어가지 않도록 직원들 입막음을 했어.
더는 그 여자와 한집에서 살고 싶지 않았어. 임신한 여자가 다른 놈하고 그 짓 하다가 내 애를 놓친 걸 생각하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어.
싸움 끝에 이혼하자고 하니까 그러자고 하더라고. 시간을 주면 범벅 할 것 같아서 바로 수속해서 이혼했어.
그런데 왜 생각이 바뀌었는지 몰라도 재결합 얘기를 하는 거야. 끔찍해. 그럴 생각 없어.”
“그 사실을 장인어른이 알면 어떨까?”
“그 사람을 집에 가두고 꼼짝도 못하게 하실 거야. 아니면 호적에서 빼버릴 수도 있을 거고. 장인어른은 꽉 막힌 분이 아니야.
내 능력을 인정해주셨고, 끊임없이 일할 수 있도록 밀어주셨어. 감사한 분이야.”
“그래도 딸인데, 딸 편들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 얘긴 그만하자. 어쨌든 난 그 여자하고 다시는 얽히지 않을 거야.”
효준이 와인을 벌컥 들이켜자 희수가 잔을 채웠다. 그런 아픔을 가슴에 묻고 어찌 살아갈까? 와이프하고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를 잃었잖은가.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에 고통스럽지 않을까? 희수는 효준의 손등을 쓰다듬어주었다.
“힘들겠다. 많이 아프겠어.”
“아파. 언제쯤 아픔이 멈출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당신이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용서해주면 안 돼?”
“당신이 안쓰럽고 딱하긴 하지만, 마음이 풀려야 하잖아. 마음이 안 풀려.”
“그럼 오늘은 왜 초대한 건데?”
“나 좀 괴롭히지 말라고 접대한 거야. 나 다시 셰프로 일하게 해줘.”
“나하고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게 싫어?”
“일하고 싶어. 내가 잘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라고.”
희수의 앓는 말에 효준은 웃었다. 같이 있고 싶어서 그녀를 비서로 끌어들였다. 그녀가 셰프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서 일도 조금씩 배우고 알아가면서 적응하는 것 같았는데 결국 원하는 건 셰프인 것이다.
“주방으로 돌아가면 더 힘들지 않겠어? 소문이 날 대로 났잖아.”
“괜찮아. 그런 거 신경 안 써.”
“이게 접대한 거야?”
“접대로 하니까 뉘앙스가 좀 이상하네. 대접이라고 하자.”
“난 접대가 더 좋은데?”
“응?”
“그리고 몸으로도 접대 받고 싶어.”
“뭐?”
그녀가 인상을 쓰자 그가 엉큼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차린 희수는 호르몬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꿈도 꾸지 마.”
“나만 하고 싶은 거야?”
“당신만 하고 싶은 거야. 난 아니야.”
희수의 거짓말을 효준은 믿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홍조를 띠는 거 보고 확신했다. 그가 다가가자 그녀가 엉덩이를 밀어 뒤로 물러났다.
“밀당하자는 거야?”
“아니. 안 하겠다는 거야.”
그녀가 슬금슬금 도망가려 하자 그가 몸을 날려 그녀를 덮쳤다.
“도망가게 둘 것 같아?”
“나, 당신 용서하지 않았다고.”
“용서하지 않았지만, 저번에는 우리 뜨겁게 사랑했잖아. 아! 당신은 욕망을 배출한 거라고 했던가?”
그날도 너무 좋았던 희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 몸에 손을 댄 남자는 효준 뿐이라는 것도 자존심 상했고, 너무 황홀하고 좋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그를 할퀴었다.
“맞아. 내가 지금 당신과 또 한다면 욕망 배출구로 당신을 이용하는 거야.”
“8년 동안 남자 안 만나고 뭐 했는데? 나 기다린 거 아니야?”
그는 그녀의 뺨을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미쳤어? 내가 왜 당신을 기다려? 남자가 생기지 않았을 뿐이야. 휘석이가 항상 곁에 있으니까 연인으로 오해한 사람들도 있었고. 잘난 척하지 마.”
“그래? 그럼 욕망 배출구로 이용해. 당신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한 놈으로서 그 정도 이용은 당해줄게.”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하지 마. 당신과 다시 엮이지 않을 거야. 흐으읏.”
그가 그녀의 귓가와 목에 입술로 애무했다. 짜릿짜릿 전율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흐으음. 당신 향기는 언제나 좋아. 내가 당신을 이토록 맛있게 숙성시킨 걸까?”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 거야?”
“당신한테 남자를 가르친 것이 나잖아. 당신을 만진 사람은 나뿐이고. 당신은 내 작품이야.”
“나쁜 놈! 파렴치한 놈!”
“자극적인데? 변태 같아, 당신. 더 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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